지난해 시작된 벤처투자 혹한기가 새해에도 이어지면서 스타트업 업계에는 '생존'이 최대 화두입니다. 한경 긱스(Geeks)는 주요 벤처캐피털(VC) 대표 및 파트너 24명을 대상으로 올해 벤처투자 전망을 듣고 스타트업의 생존법을 찾기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자세한 결과는 한국경제신문 기사를 통해 소개됩니다. 이와 별도로 VC 대표들에게 올해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을 물었습니다. 수많은 포트폴리오사 가운데 딱 두 곳을 꼽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때문에 선택하지 않은 응답자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투자 혹한기를 뚫고 더욱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의 스타트업을 소개합니다.
올해 벤처캐피털(VC)이 가장 주목하는 투자 분야는 어디일까. 주요 VC 대표 및 파트너 24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 로봇(70.8%)과 디지털 헬스케어(66.7%)가 가장 많은 복수선택을 받았다. 이어 2차전지(50%),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반도체·모빌리티(41.7%), AR·VR 콘텐츠(37.5%)가 뒤를 이었다. VC가 꼽은 올해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 면면에서도 이런 추세가 나타났다.
기술력 앞세운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VC 대표가 꼽은 올해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 가운데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로는 △3차원(3D) 홀로그래피 현미경 제조업체 토모큐브 △맞춤형 영양 관리 서비스 알고케어 △디지털 트윈 기반 의료 AI 솔루션 기업 메디컬아이피가 꼽혔다.
박용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와 광학 사업을 하던 홍기현 대표가 2015년 함께 설립한 토모큐브는 세계 처음으로 3D 홀로토모그래피 현미경을 상용화했다. 세포에 형광 시약을 주입한 뒤 레이저를 투과해 관찰하는 기존 현미경과 달리 3D 홀로토모그래피 현미경은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할 수 있다. 이 현미경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하버드 의과대학,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서울대 의대 등에서 발표된 200여건의 연구 결과에 기여했다.
알고케어는 CES 2023에 참가해 '알고케어 나스(Algocare NaaS)'를 선보였다. 인공지능(AI) 닥터와 사물인터넷(IoT) 영양 관리기기, 밀리미터 초소형 영양제, 헬스케어 모바일 앱이 결합한 종합 솔루션이다.
메디컬아이피도 이번 CES에서 의료 영상 분석 기술에 3D 모델링 기술을 융합해 인체 장기를 실제와 동일한 3차원 영상으로 시각화하는 솔루션인 '메딥프로'를 선보였다. 또 인체를 3D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해 해부학 실습 교육을 가능케 한 '엠디박스'도 개발했다.
인체 장기를 실제와 동일한 3차원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해낸 '메딥프로' / 사진=메디컬아이피
임상 결과 앞둔 신약벤처
바이오·신약 개발 기업으로는 △하이센스바이오(치과 질환 치료제) △디앤디파마텍(파킨슨병 치료제) △일리미스테라퓨틱스(알츠하이머병 치료제)가 꼽혔다. 일회용 최소침습 복강경 수술 기구 업체 리브스메드도 유망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디앤디파마텍은 올해로 세 번째 기업공개(IPO)에 도전한다. 1분기 중 나오는 파킨슨병 임상 2상 주요 결과가 상장 결과를 좌우할 전망이다. 지난해 말 240명 환자를 대상으로 한 파킨슨병 적응증 글로벌 임상 2상 투약을 마치고 현재 임상 데이터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오리온홀딩스와 합작법인 오리온바이오를 설립한 하이센스바이오는 100억원 규모로 시리즈 C 브릿지 펀딩을 조달 중이다. 연내 시린이 치료제의 임상(2a상)을 마무리하고 기술성 평가를 신청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다. 기업가치는 2021년 6월 130억원 규모 시리즈 C 라운드와 같은 800억원으로 적용된다.
일리미스테라퓨틱스를 공동 창업한 김찬혁 정원석 KAIST 교수는 신경과 시냅스에 손상을 주는 염증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하는 플랫폼 기술을 개발했다. 회사는 올해 상반기 중 후보물질 최적화를 마친 뒤 올해 하반기 중 전임상에 진입할 계획이다.
'대어급' B2B SaaS
VC 대표들은 기업 대상(B2B)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스타트업에도 주목했다. △머신러닝 기반 광고 솔루션을 제공하는 몰로코 △3D 패션 디자인 소프트웨어 기업 클로버추얼패션 △AI 가축 헬스케어 솔루션 기업 한국축산데이터가 꼽혔다.
몰로코는 사용자의 공개된 간접 정보를 AI 머신러닝을 통해 분석해 맞춤형 광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구글에서 유튜브 수익 모델을 만든 안익진 대표가 2013년 설립했다. 몰로코는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VC인 타이거글로벌 매지니먼트의 시리즈 투자에서 15억달러(1조8750억원)의 가치로 평가받은 바 있다.
2009년 홍익대 인근 옥탑방에서 시작한 클로버추얼패션은 3D 의상 디자인 시장에서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지난해 11월 방한한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직접 만나 주목받기도 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클로’를 활용하면 의상 디자인뿐만 아니라 가상 공간에서 런웨이까지 모든 의류 제작 과정을 3D로 구현할 수 있다. 구찌 아디다스 블리자드 메타 등 의류·정보기술(IT) 기업이 고객사로, 매출의 90%를 해외에서 내고 있다.
한국축산데이터의 가축 디지털 헬스케어 솔루션 '팜스플랜'은 AI를 활용한 가축 상태 모니터링 및 분석과 함께 정기적인 가축 면역력 검사로 개별 맞춤 가축 건강관리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 회사는 2021년 11월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신한벤처투자 등으로부터 200억원 규모 시리즈 B 단계 투자금을 유치했다.
반도체 설계 전문 스타트업 '경쟁'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퓨리오사AI와 리벨리온도 나란히 올해의 기대주에 이름을 올렸다.
퓨리오사AI는 AI 연산에 최적화된 시스템 반도체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직접 설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AMD, 인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 백준호 대표(사진)가 2017년 창업했다. 현재 삼성전자 파운드리에서 컴퓨터 비전용 고성능 AI 반도체 '워보이'를 위탁 생산 중이며, 올해 상반기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글로벌 판매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내년엔 대만 TSMC 파운드리를 통해 데이터센터 및 서버용 AI 반도체 칩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퓨리오사AI는 현재 1500억원 규모의 시리즈 C 단계 투자금을 모집하고 있다. DSC인베스트먼트, 산업은행 등 기존 주주들이 대부분 참여할 예정이다. 퓨리오사AI 측이 제시한 기업가치는 8500억원으로, 투자 후 기업가치 1조원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인텔, 스페이스X, 모건스탠리 등 반도체와 금융 기업을 거친 박성현 대표가 2020년 설립했다. 창업 1년여만에 금융거래 전용 AI 반도체 '아이온'을 출시하며 주목받았다. 처리 지연 시간 최소화, 빠른 속도에 강점이 있다. 회사는 2년 만에 누적 투자금 1000억원을 유치했고 삼성전자 및 TSMC와 AI 반도체 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항공우주 스타트업도 합류
루미르, 이노스페이스 등 항공우주 분야 스타트업도 올해의 기대주에 이름을 올렸다.
루미르는 2009년 문을 연 위성탑재 장치 개발제조 회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티어1(Tier1)' 업체로, 지난해 8월 발사한 달 탐사선 '다누리호'에 우주 인터넷 탑재체를 납품했다. 오는 5~6월 예정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3차 발사에서는 큐브위성을 탑재해 쏘아 올리게 된다.
이노스페이스는 2017년 설립된 우주 발사체 스타트업이다. 하이브리드 로켓 독자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소형 위성 시장에서 저비용·저지연·안정적인 발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노스페이스는 지난달 19일 우리나라 첫 민간 우주발사체 '한빛-TLV'를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기상악화, 기기 결함 등으로 올해 1분기로 발사 일정을 연기했다. 한빛-TLV는 이노스페이스가 독자 개발한 엔진 검증용 시험발사체다. 이 회사는 시리즈 B 단계까지 총 352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친환경 테크기업에 주목
친환경 분야 기술기업으로는 △엑스레이 튜브로 만든 공기 환기장치 제조업체 어썸레이 △스마트팜 솔루션 기업 넥스트온 △배터리 진단 솔루션 기업 민테크가 기대주에 올랐다. 이밖에 △핀미러 방식의 증강현실(AR) 렌즈 솔루션 개발기업 레티널도 올해 유망 스타트업으로 꼽혔다.
어썸레이는 메탄 등 원재료에서 탄소나노튜브 섬유를 뽑아내는 원천기술을 보유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스타트업이다. 서울대 재료공학 박사인 김세훈 대표를 포함해 신소재와 엑스레이 장비 전문가들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어썸레이는 의료 및 보안 검색용 엑스레이에 사용되는 엑스레이 튜브를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공기청정기 '에어썸'에 접목해 주목받았다.
버티컬 팜(식물공장) 업체인 넥스트온은 이달 쿠웨이트 투자회사 마와리드홀딩스와 합작회사 '넥스트온 미나'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설립했다. 넥스트온 미나는 설립해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오만 바레인)에 2400평 규모 식물공장 10개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배터리 진단 전문기업 민테크는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대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민테크의 핵심 기술은 임피던스 측정법이다. 임피던스는 교류 회로에서 전류가 흐르기 어려운 정도를 나타낸다. 이를 통해 배터리를 재사용할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배터리 성능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판단할 수 있다. 빠르게 성장하는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을 겨냥한다. GS에너지 등이 2021년 말 150억원 규모 시리즈 B 투자에 참여했다.
이밖에 핀미러 방식의 증강현실(AR) 렌즈 솔루션 개발기업 레티널도 올해 주목할 스타트업에 꼽혔다. 2016년 설립된 레티널은 창업 초기부터 핀미러 방식의 AR 렌즈에 파고들어 상용화에 성공했다. 지난해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 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핀미러는 구멍을 통과한 빛이 선명한 상을 만드는 원리를 활용한다. 레티널은 플라스틱 소재의 AR 렌즈로 이번 CES 2023에서 혁신상을 받았다. 제작비용과 무게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는 설명이다.
틈새시장 노린 독보적 사업모델
독보적인 사업모델을 갖춘 스타트업들도 올해 성장이 예상된다. △'서브컬처' 게임을 공략한 시프트업 △중국어교육 플랫폼에서 금융 유튜버 솔루션 기업으로 어스얼라이언스 △특허 관리 전문회사로 처음 IPO를 추진하는 아이디어허브 △한 달 살기 숙소검색 서비스를 하는 초기 스타트업 리브애니웨어가 꼽혔다.
시프트업은 서브컬처 게임 회사다. 서브컬처 게임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2D 그래픽의 미소녀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 장르를 말한다. 시프트업이 지난해 11월 출시한 '승리의 여신: 니케'는 출시 한 달 만에 1억달러 규모 매출을 거두며 MMORPG 장르의 리니지 시리즈를 제치고 게임 매출 순위 1위에 올랐다. 이 회사는 지난해 7월 IMM인베스트먼트와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에 일부 구주 매각을 하면서 기업가치 1조원대로 평가받았다.
파산 직전의 중국어 교육 회사였던 어스얼라이언스는 경제 유튜버 회사로 전환하며 기사회생한 회사다. 2011년 설립된 '차이나다'가 전신이다. 중국어 교육 서비스 '차이나탄'을 출시하며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투자받았지만 중국의 사드 보복 사태로 중국어 교육 수요가 꺾이면서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2021년 사명을 어스얼라이언스로 바꾸고 경제 유튜버 솔루션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지난해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 8월 하나벤처스로부터 70억원 규모 시리즈 C 라운드 투자를 유치했다.
어스얼라이언스에는 증권사 이코노미스트 김영익, '미국 주식으로 은퇴하기' 채널을 운영하는 최철, 국민연금 출신의 홍춘욱, '돈깡의 알고하는투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돈깡 등 금융 분야 대표 크리에이터 42명이 속해있다. 크리에이터를 관리하는 다중 채널네트워크(MCN) 업무뿐만 아니라 금융 콘텐츠 플랫폼, 출판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플랫폼 '왕중왕'은
슈퍼 앱을 운영하는 유니콘 플랫폼 기업도 여전히 기대받고 있다. △여성 패션 쇼핑몰 에이블리 △'토스' 앱을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 △세무 플랫폼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 △부동산 플랫폼 직방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집'을 운영하는 버킷플레이스 △레스토랑 예약관리 솔루션 '캐치테이블'을 운영하는 와드가 올해 기대되는 스타트업에 이름을 올렸다.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소비자들은 이미 플랫폼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졌다"며 "MZ세대 소비자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의 신뢰를 받아 '팬덤'을 구축한 플랫폼 기업은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가나다순) △김기준 카카오벤처스 파트너 △김도한 CJ인베스트먼트 대표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 △김종필 KB인베스트먼트 대표 △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 △김학범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대표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 △남기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대표 △박하진 HB인베스트먼트 대표 △송은강 캡스톤파트너스 대표 △위윤덕 DS자산운용 대표 △유승운 스톤브릿지벤처스 대표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 △이동현 신한벤처투자 대표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 △임정민 시그나이트파트너스 파트너 △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 △정근호 스틱벤처스 대표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 △조창래 에이벤처스 대표 △지성배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 △진윤정 소프트뱅크벤처스 파트너 △채정훈 미래에셋벤처투자 파트너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
비철금속 업체 풍산이 최근 한 달 새 5700억원어치의 포탄 공급계약을 맺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155㎜ 포탄과 전차 포탄 재고량이 뚝 떨어진 영향이다.2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풍산은 지난달 20일부터 최근까지 방위사업청(1167억원), 현대로템(2934억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1647억원) 등과 총 5748억원어치 공급계약을 맺었다. 이 회사의 한 달 공급 계약액이 2020~2021년 누적분(5494억원)을 웃돌았다.풍산은 5.56㎜ 소총 탄알부터 155㎜ 곡사포탄, 대공포탄, 박격포탄, 전차포탄, 함포탄 등 한국군이 사용하는 모든 탄약을 제조 납품하고 있다. 회사 측은 보안을 이유로 구체적 공급 제품과 수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부분의 물량을 155㎜ 포탄으로 파악하고 있다. K9 자주포를 생산하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방위사업청에는 155㎜ 자주포용 포탄, K2흑표 전차를 생산하는 현대로템에는 120㎜ 전차용 포탄을 공급한 것으로 추정된다.공급 계약액이 늘어난 배경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한국 방산업체들은 지난해 폴란드와 K2 전차, K9자주포 등의 무기 124억달러(약 15조6800억원)어치를 공급하는 수출 계약을 맺었다. 그 덕분에 K2 등에 들어가는 포탄 판매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풍산 방산 부문의 기업가치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증권가에서는 이 회사의 올해 영업이익이 지난해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2436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지난달부터 여러 대형 웹사이트에서 ‘크리덴셜 스터핑’ 기법을 통한 개인정보 도용이 이어지고 있다.24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크리덴셜 스터핑은 해커가 다른 웹사이트에서 확보한 정보를 활용해 계정을 도용하는 것을 뜻한다. 특정인이 자주 쓰는 ID와 비밀번호를 파악한 후 아무 웹사이트나 들어가서 로그인을 시도해보는 식이다. 웹 서버는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정보를 로그로 남기지 않는 만큼 해커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가장 최근의 피해 사례는 지마켓이다. 이달 초 IP 식별이 어려운 해커가 이용자들의 계정으로 지마켓에 접속해 각 이용자가 구매해놓은 모바일 상품권을 무단으로 사용했다. 한 이용자는 이번 사태로 상품권 100만원어치를 도난당하기도 했다.지난달엔 해커가 LG유플러스 일부 이용자의 계정으로 로그인해 이용 요금제를 아무렇게나 변경한 일이 발생했다. 인터파크도 최근 이용자를 대상으로 누군가 사전에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타인의 계정 정보를 악용해 인터파크에 로그인을 시도했다는 공지를 띄웠다.세 업체 모두 개인이나 일당이 외부에서 확보한 개인 계정 정보를 가지고 웹사이트에 접속해 정보를 도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승민 큐비트시큐리티 대표는 “이용자 입장에선 비밀번호를 바꾸는 게 최우선 조치”라고 말했다.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한국 온라인 플랫폼 시장은 세계적으로 드문 생태계 조성 사례로 꼽힌다. 구글, 메타(옛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외국 ‘빅테크’에 의존하는 대부분 국가와 달리 국내 기업이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추고 있어서다. 국내 플랫폼 기업은 포털, 메신저, 모빌리티, 쇼핑 등 각 분야에서 혁신 사례를 만들었다.올 들어 온라인 플랫폼을 겨냥한 각종 규제 움직임이 부쩍 강해지고 있다. 지난 12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온라인플랫폼 사업자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심사지침’(온라인플랫폼 심사지침)이 첫 신호탄이다. 반면 업계에선 국내 플랫폼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자율 규제에 기반을 둔 지원 정책에 주력해야 할 때라는 반론이 나온다. 한국경제신문은 ‘플랫폼 정책 방향 점검’을 주제로 20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좌담회를 열었다. 윤창현 국회의원(국민의힘), 신영선 율촌 상임고문(전 공정위 부위원장), 이호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장,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안현실 한경 논설위원이 사회를 맡았다.▷안현실 논설위원(사회)=공정위가 12일 발표한 온라인 플랫폼 심사지침을 어떻게 평가합니까.▷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정부는 예측 가능성을 높여줬다고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고민거리가 더 많아졌습니다. 이번 지침을 살펴보면 대부분 ‘모든 걸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겠다’는 식입니다. 기존엔 제재받지 않던 일도 불공정 행위 사례로 적시했습니다.▷이호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장=‘경쟁 제한’에 집중하고 ‘효율성 증대’는 뒷전으로 밀릴까 걱정입니다. 플랫폼 시장의 효율성 증대 효과는 비교적 천천히 나타납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기존 사업자와) 분산 제공해 모두의 편익이 증가하는 방식이니까요. 그래서 ‘효율성을 얼마나 끌어올렸다’고 정량화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면 (기준만 정해지면) 금방 나오는 점유율은 문제 삼기 쉽습니다.▷사회=업계와 당국 간 이견이 큰 이유는 뭘까요.▷신영선 율촌 상임고문(전 공정위 부위원장)=기존 산업과 달리 시장 범위를 확정하기 어려운 플랫폼 시장 특성 때문입니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시장을 만들어가는 ‘양면 시장’인 경우가 많고, 종전의 잣대로 판단하기엔 너무 빨리 변하니까요.▷사회=해외 사례는 어떻습니까.▷이 원장=전통적인 공정거래경쟁법과 달리 국가·지역 간 차이가 큽니다. 유럽연합(EU)은 상당히 엄격한 규제를 적용하고, 미국은 관대한 편입니다.▷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지역 내에 큰 플랫폼 회사가 없는 EU는 미국 빅테크를 겨냥해 규제를 강화하는 거죠. 미국에서도 2년 전부터 빅테크 견제 법안이 여럿 나오긴 했지만 작년 말 회기(117대 의회) 만료로 대부분 폐기됐습니다. 자국 우선주의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우선하는 결정을 한 거죠.▷사회=바람직한 플랫폼 규제 방향은 뭘까요.▷신 고문=국내 플랫폼사인 카카오와 네이버 등은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GAFA) 등 미국 빅테크와 매출·시가총액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고, 시장지배적 사업자도 아닙니다. 시장 내 유효 경쟁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규제를 만들 때 산업 혁신을 가로막거나, 경제 효율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시장지배적 플랫폼이 있는 부분에서는 법 집행을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윤 의원=플랫폼 시장은 신산업입니다. 어떤 혁신이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고, 시장이 계속 움직이죠. 아직 모호한 점이 많으니 당국이 보다 신중하게 규제와 정책 전반의 효과성을 충분히 분석해 국익 관점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이 원장=새로운 사업에 기존 규제 체제를 그대로 적용하면 누구도 ‘혁신의 과실’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패배자가 되겠죠. 전체 사회 후생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사회=윤석열 정부는 앞서 자율 규제 기조를 공언했습니다.▷신 고문=자율 규제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면 그 시장 영역에 대해선 규제 기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당국은 자율 규제를 지원하고, 모범 사례가 있으면 공유하되 특정 기업의 행위가 지나치다고 판단할 때는 위법 여부를 가리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이 원장=온라인 플랫폼의 사용자와 사업자 간 거래는 서로 이해관계를 조정해 가는 사적인 거래입니다. 전형적으로 자율 규제가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사회=플랫폼 기업의 자사 서비스 우대 행위는 어떻습니까. 어디까지 허용해야 합니까.▷최 대표=플랫폼 기업이 서비스와 콘텐츠를 고도화하는 일을 당국이 자사 우대 행위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네이버는 해외 진출에 앞서 오픈마켓 수수료를 확 낮추고 일반 소상공인에게 플랫폼을 개방했는데, 네트워크 효과가 생겨 결과적으로 네이버의 시장 지배력이 커졌지만 소상공인 입장에선 네이버에서 팔 때 수수료가 제일 덜 나가는 이득을 봤습니다. 이용자의 후생이 커지는 행위를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이 원장=온라인 플랫폼은 이용자의 선택을 계속 받기 위해 서비스 품질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자사 우대는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사회=플랫폼 때리기 정책이 정부의 다른 정책과 충돌하기도 합니다.▷최 대표=카카오모빌리티의 경우엔 가맹 택시에 인공지능(AI) 알고리즘으로 ‘콜(호출) 몰아주기’를 했다며 공정위가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기업이 단순히 가맹비를 낸 사람을 우대하려고 알고리즘을 짠 게 아니에요. 소비자가 택시를 불렀을 때 거리 등을 따져 콜을 거절하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서 콜 수락률이 높은 사람에게 우선 배차한 거죠. 결과적으로는 소비자의 대기 시간이 확 줄었습니다. 이런 효과를 무시하고 AI 배차를 금지하면 소비자들은 택시 잡기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정부가 추진 중인 택시 대란 해소 정책과는 거꾸로 가는 거죠.▷이 원장=국내 택시 시장은 기존엔 저요금·저품질, 제한된 소비자 선택권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빌리티 플랫폼이 등장해 소비자 선택권이 확 늘었어요. 수수료를 조금 더 내면 고품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장이 열린 겁니다. 이처럼 시장에 많은 사업자가 뛰어들어 경쟁이 활성화하도록 유도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윤 의원=윤석열 정부는 디지털 경제 패권 국가로 도약하겠다는 게 주요 목표 중 하나입니다. 이 같은 기조와의 적합성도 고려해야 합니다.정리=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