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내부자가 주식을 산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미국의 전설적 투자자 피터 린치가 한 말이다. 기업 내부 사정에 가장 밝은 최고경영자(CEO)의 주식 매매가 시장의 관심을 받는 이유다. CEO가 자기 회사 주식을 팔면 시장은 고점으로 받아들인다. 주식을 사면 그 반대다.
고점에 던졌나…자사주 1兆 내다판 CEO들
지난해 국내 상장사 CEO는 총 1조원어치 자사주를 매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몇몇 기업은 CEO의 자사주 매각이 ‘고점 논란’을 일으켜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CEO를 비롯한 임원의 주식 매매를 규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사주 1조원어치 순매도

5일 금융감독원이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1월 1일~12월 15일) 국내 전체 상장사 CEO 중 322명이 자사주를 거래했다. 이들이 사고판 자사주를 총합하면 약 1조16억원어치 순매도한 것으로 집계됐다. 자사주를 100억원 이상 팔아치운 CEO는 33명에 달했다. 반면 100억원 이상 사들인 CEO는 구본준 LX홀딩스 회장밖에 없었다.

자사주를 가장 많이 순매도한 CEO는 김용우 더존비즈온 대표다. 지난해 5월 20일 글로벌 사모펀드(PEF) 베인캐피탈에 1650억원어치를 매각했다. 이 밖에 정영배 ISC 회장(1342억원 순매도), 김기린 전 신흥에스이씨 대표(889억원), 박인규 위지윅스튜디오 공동대표(527억원), 류영준 카카오페이 대표(469억원) 순으로 자사주를 많이 매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사주를 가장 많이 사들인 CEO는 구본준 회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LG그룹과 LX그룹의 계열분리를 위한 거래였다. 이 밖에 김병규 아모텍 회장(48억원),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40억원), 손성은 메가스터디교육 대표(37억원), 강승곤 큐브엔터 대표이사(35억원) 등이 자사주 순매수 상위 CEO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그룹 사고 카카오그룹 팔아

그룹사별로 매매 형태는 달랐다. 삼성그룹 계열사 CEO들은 지난해 일제히 자사주를 사들였다. 김기남 전 삼성전자 대표(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는 지난해 4월 21일 8억3800만원어치를 매입했다. 경계현 전 삼성전기 대표이사(현 삼성전자 사장·1억9600만원), 최영무 전 삼성화재 사장(1억7000만원), 전영묵 삼성생명 대표(1억5600만원) 등도 주식을 사서 보유하고 있다.

반면 카카오그룹 계열사 CEO들은 대거 자사주 매도에 나섰다. 여민수 카카오 공동대표는 지난해 10월 13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자사주 4억5000만원어치를 순매도했다. 남궁훈 카카오게임즈 대표는 지난해 11월 9일 자사주를 1억원어치 팔았고, 류영준 카카오페이 대표는 상장 직후인 지난달 10일 469억원어치를 매각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특정 그룹에서는 임원이 자사주를 못 팔게 하는 등 그룹사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며 “카카오그룹주는 지난해 많이 올랐고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 부담이 커졌기 때문에 차익 실현에 나섰을 수 있다”고 했다.

○‘고점 논란’ 키우기도

통상 시장에서는 CEO가 자사주를 매각하면 주가가 고점이라는 신호로 해석한다. 류영준 대표는 지난달 10일 평균 20만4017원에 자사주 23만 주를 매각했다. 카카오페이 주가는 이날까지 한 달도 채 안돼 24.22% 하락했다. 데브시스터즈 주가는 김종흔 대표가 지난해 11월 16일 13만3830원에 34만 주를 매도하고 한 달 만에 38.80% 급락했다. 윤석준 하이브 CEO는 지난해 11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6만 주를 팔았는데, 하이브 주가는 한 달간 19.57% 빠졌다.

CEO의 자사주 매각이 항상 악재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더존비즈온 주가는 김용우 대표의 자사주 매각 공시가 나온 당일 0.48% 상승했다. 김 대표가 자사주를 베인캐피탈에 매각하면서 “우리 솔루션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한 베인캐피탈과 함께 소프트웨어 시장을 공략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장외에서 매각했기 때문에 시장 충격은 없었다.

일각에선 CEO 등 임원의 자사주 거래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원의 자사주 매매가 시장에 단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고, 임원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상장사 임원들이 자사주 거래 120일 전까지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