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산업화 확대로 전력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높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안보 리스크로 떠올라서다. 베트남을 필두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구체적인 원전 도입 계획을 내놨다. 글로벌 원전 기업은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원전 도입 속도 내는 아세안
15일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동남아 국가의 전력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6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의 전력 수요가 올해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5.4%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용과 냉방용 수요에 더해 데이터센터 신설을 주원인으로 지목했다. 아세안의 전력 수요는 2015년 이후 60% 이상 늘었다.
동남아 국가 중 원전 건설 사업이 가장 구체화된 곳은 베트남이다. 2024년 11월 베트남 의회는 2016년 중단한 ‘닌투언 원전 사업’을 재추진하기로 결정했다. 2035년까지 4~6.4기가와트(GW) 규모 원전을 가동하는 것이 목표다. 베트남전력공사에 따르면 베트남의 최대 전력 수요는 올해 58.1GW로 증가했다. 베트남 정부는 관련 수요가 2030년 89.7~99.9GW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전력 공급 불안을 겪는 필리핀도 원전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필리핀 에너지부는 자국 전력망의 피크 수요가 2022년 16.6GW에서 2030년 25.4GW, 2050년 68.5GW로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5월에는 세부 등 필리핀 중부 지역을 담당하는 비사야제도 전력망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적색경보가 발령됐다. 정부는 2050년까지 총 4.8GW 규모 원전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경쟁입찰 규칙을 마련하고 있다.
5년간 아세안 전력 수요 증가분 중 40%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는 2034년까지 발전 설비를 69.5GW 확충할 계획이다. 이 중 0.5GW를 원전 2기로 충당한다. 태국은 장기 전력 계획에서 0.3GW급 소형모듈원전(SMR)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2035년 전력 소비의 약 31%가 데이터센터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말레이시아도 원전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글로벌 기업 시장 쟁탈전도 ‘시동’
물론 본격적인 사업 입찰에 들어가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조너선 코브 세계원자력협회(WNA) 수석책임자는 “원전은 대규모 선행 투자가 필요한 만큼 자본 조달 비용과 공기 지연 위험 등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며 “동남아 각국은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원자력 규제 기관을 초기부터 구축하고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원전 기업은 벌써부터 동남아 원전 수주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전략적 파트너 선정 및 협상 단계에 있는 베트남 닌투언2 사업과 관련해선 한국전력이 수주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전은 베트남국가산업에너지그룹과 사업 조건을 협의 중이다. 닌투언1 원전은 러시아 국영 원전 기업 로사톰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수력원자력 등 국내 원전 기업이 1.2GW 사업 참여를 준비 중이다. SMR 타당성 조사에 나선 태국에서는 한수원, 중국핵공업그룹(CNNC)이 각각 태국전력청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중동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에너지 비용이 급증하자 아세안 국가들이 공동으로 에너지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크리슈나 스리니바산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은 지난 1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아세안이 특히 경계해야 할 위험 중 하나로 에너지 충격을 꼽았다. 라오스를 비롯한 전력 생산 지역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수요 지역을 송전망으로 연결하는 ‘아세안 전력망 사업’ 구상도 힘을 얻고 있다.
손주형 기자는 한국경제에서 글로벌 경제 및 사회 이슈를 취재합니다. 최근에는 미국·이란 전쟁의 전황과 그 여파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자 지면 <월드선데이> 코너에서는 테크(기술) 이슈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소식을 소개합니다. 2024년 입사해 편집부와 건설부동산부를 거쳐 국제부에서 취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