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세계 각국의 혈액 공급망에 경고등이 켜졌다. 폭염이나 휴가철 같은 계절적 요인에 따른 일시적인 수급 불안이 아니라 헌혈을 주로 담당해온 젊은 인구는 줄고 수혈 수요가 많은 고령층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서다.

각국은 헌혈 가능 연령 확대와 신규 헌혈자 확보, 혈액 사용 효율화, 인공혈액 개발 등에 나서고 있지만 공급 기반이 줄어드는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고령화가 더 진행될수록 수혈 수요는 늘고 헌혈 가능 인구는 줄어드는 만큼 혈액 부족이 일시적 비상사태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의 상시적인 위험요인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수혈 수요는 급증, 헌혈자는 감소

28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세계에서 연간 확보되는 혈액은 1억2040만건이다. 고소득 국가의 인구는 세계의 15%에 불과하지만 전체 헌혈의 36%가 이들 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의료 체계가 발달한 국가에서도 고령화와 헌혈자 감소가 맞물리면서 혈액 재고가 위험 수위까지 떨어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 적십자사는 지난 7월 사상 두 번째로 국가 혈액 공급 위기를 선언했다. 6월 한 달 동안 전국 혈액 공급량이 약 25% 급감했고 병원으로 나가는 혈액은 예상보다 매주 약 3500유닛 많았다.
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헌혈 건수는 최근 4년간 여름철 기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O형 혈액 부족이 심각해 적십자사는 병원 공급까지 제한했다. 미국 혈액 관련 기관들은 여름철 학교 헌혈 행사가 줄어드는 가운데 여행 증가까지 겹치면서 기존의 헌혈 기반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에서는 혈액 부족이 실제 의료 서비스 제한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 혈액·이식국(NHSBT)은 2024년 O형 혈액 부족으로 전국에 앰버 경보를 내렸다. 당시 O형 음성 혈액 재고는 1.6일분, 전체 혈액 재고는 4.3일분까지 떨어졌다. 병원에는 O형 혈액 사용을 필수 환자로 제한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영국 정기 헌혈자 79만8000명 가운데 45세 이상이 51%를 차지하며 17~24세 헌혈자는 5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상태다. NHSBT는 매년 기존 헌혈자를 대체하기 위해 약 20만명의 신규 헌혈자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충격이 가장 선명한 곳은 일본이다. 일본 적십자사에 따르면 10~30대 헌혈자는 2015년 약 204만명에서 지난해 156만명으로 10년 만에 48만명 줄었다. 반대로 수혈용 혈액제제를 사용하는 환자의 약 85%는 50세 이상이다.

헌혈자의 60% 이상이 50세 미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혈액을 공급하는 젊은 층은 감소하고 혈액을 필요로 하는 고령층은 증가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적십자사는 저출산·고령화가 지속되면 안정적인 혈액 공급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빠르게 현실화하고 있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무상 헌혈은 1510만건, 채혈량은 2550만유닛으로 인구 1000명당 헌혈률은 10.9명까지 떨어졌다. 세 지표 모두 2023년보다 약 11% 감소했다.

중국의 혈액 공급량(2024년 기준)은 2690만유닛으로 추산된 임상 수요 3300만유닛에 크게 못 미쳤는데 고령화로 암과 혈액질환 치료가 증가하면서 수요는 계속 커지고 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은 "2023년 사상 최고치를 찍었던 헌혈과 채혈량이 이후 2년 연속 감소했다"고 전했다.

중국은 헌혈 연령 상향 추진

문제는 거꾸로 가는 수요와 공급 방향이다. 고령층이 늘수록 암 수술과 심혈관 수술, 혈액질환 치료 등 수혈을 필요로 하는 의료행위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 공중보건청도 기대수명 증가로 혈액제제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세계 각국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젊은 헌혈자는 줄고 고령층의 수혈 수요는 늘면서 혈액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실제 프랑스에서는 150만명의 헌혈자(2024년 기준)가 260만건 이상의 헌혈을 담당하고 있다. 독일 역시 기존 헌혈자의 부담이 불어나고 있다. 활동 헌혈자 수가 감소하면서 더 적은 수의 단골 헌혈자가 더 자주 피를 제공하는 구조가 형성돼서다.

독일 적십자는 향후 헌혈이 활발한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 출생자) 약 27만5000명이 헌혈자군에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출산·고령화가 노동력과 연금에 이어 의료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인 혈액 공급까지 흔들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상황이 이렇자 각국은 헌혈 기반을 넓히기 위한 제도 개편에 나서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1998년 시행된 헌혈법을 27년 만에 전면 손질하고 있다.

개정안은 헌혈 가능 연령 상한을 55세에서 65세로 높이고 전혈 헌혈 간 최소 간격을 현행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정부는 오는 2030년까지 인구 1000명당 헌혈률을 현재 10.9명에서 13명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저출산으로 젊은 헌혈자가 줄자 건강한 고령층까지 공급 기반에 편입하고 기존 헌혈자의 참여 횟수도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영국은 앞으로 5년 동안 신규 헌혈자 최대 100만명을 확보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장기간 헌혈할 수 있는 17~35세와 희귀 혈액형 보유자를 집중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일본도 젊은 세대의 헌혈 참여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독일은 베이비붐 세대 이탈에 대비해 신규·청년 헌혈자를 정기 헌혈자로 전환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헌혈 자체를 보완하려는 인공혈액 개발 경쟁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나라현립의대는 사람 헤모글로빈을 지질막 안에 넣은 인공 적혈구 대체제를 개발해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도 상온 보관이 가능한 합성 혈액 구성요소를 임상시험과 규제 승인, 대량생산 단계로 끌어올리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베이징 의료업계 한 관계자는 "혈액은 보관 기간이 제한돼 재고를 장기간 쌓아둘 수 없다"며 "헌혈 인구가 줄면 응급수술부터 암 치료, 장기이식까지 의료체계 전반이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미 혈액질환 환자가 수혈을 오래 기다리거나 가족과 지인을 동원해 혈액을 구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초기 연구 단계인 인공혈액은 당장 사람의 헌혈을 대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베이징=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