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 회의'에 절반이 딴짓…관리자 주당 13시간 할애
정작 핵심안건 해결 안돼 회의 '무한루프'…업무 효율 뚝
‘뚜렷한 안건 없이 관성적으로 열리는 정기회의’ ‘업무와 큰 관련 없이 일하고 있다는 기분을 내기 위해 소집되는 회의’ ‘다른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
덴마크 철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가 2021년 출간한 <가짜 노동>에서 직장인을 번아웃에 몰아넣는 요인으로 언급한 사례들이다. 잦은 회의 때문에 본업에 집중할 시간을 빼앗긴다는 직장인의 불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8일 채용정보 플랫폼 인크루트가 직장인 604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서 응답자의 56.0%가 회의 중 딴짓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회사에서 하는 회의가 효율적이라고 답한 직장인은 38.1%에 그쳤다. 그럼에도 회의에 들이는 시간은 적지 않다. 1시간 이상을 쓰는 직장인도 30.3%에 달했다.
비생산적인 회의에 따른 비용은 생각보다 크다. 회의플랫폼 업체 펠로에 따르면 미국 기업이 비생산적인 회의로 보는 손실은 연간 370억달러(약 51조원) 이상으로 추산됐다. 관리자와 임원이 주당 13시간가량을 회의에 할애하는 등 업무 시간의 상당 부분을 회의실에서 소진하는 데 따른 결과다.
물론 회의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둘러앉아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는 직장 내 소통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신기호 PSI컨설팅 대표는 “한국은 문화적으로 이미 회의의 답이 정해진 상태에서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아닌 직원도 참석하는 사례가 잦다”며 “업무 시간을 뺏고 후속 회의가 잡히는 등 ‘회의 부채’(회의에 따른 부가 노동)가 늘어 직원들이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한국경제신문은 ‘회의 잘하는 법’을 시작으로 직장인과 중간 관리자들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워크 앤드 커리어(work & career)’ 기획으로 소개한다. 직장 커리어 관리와 이직, 직장생활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어려움과 관련한 솔루션을 여러 전문가와 해외 연구 사례를 통해 제시할 예정이다.
두루뭉술한 안건에 상사 눈치까지…추가 업무 부르는 '가짜합의' 안건 세분화·결정사항 미리 정하고 소규모 토론으로 이견 조율해야
미국 유명 경영 컨설턴트로 <회의의 죽음>을 쓴 패트릭 렌시오니는 “형편없는 회의는 항상 형편없는 결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조직을 평범한 수준에 머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비효율적인 회의가 기업의 비용 손실로 이어진다는 연구도 잇따르고 있다. 회의가 끝나도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보고와 회의를 낳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회의 시간을 줄이는 것을 넘어 실제 선택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생산적 회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회의에 줄줄 새는 비용
글로벌 오디오·화상회의 솔루션 기업 자브라가 최근 발표한 ‘회의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기업들은 불필요한 회의로 매년 수백만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다. 대기업은 손실 규모가 연간 최대 1억3000만달러(약 1801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번 조사는 미국, 영국, 인도, 프랑스 등 7개국 직장인을 대상으로 했다.
자브라는 특히 회의가 끝난 후 뒤따르는 비용에 주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인의 66%는 “회의를 마친 뒤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직장인의 59%는 회의 결과를 명확히 하기 위한 추가 업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회의실에서 내려진 결론이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배경에는 ‘가짜 합의’가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구성원이 표면적으로 같은 방향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표와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를 하는 현상”을 가짜 합의라고 정의했다. 회의를 마무리할 때는 참석자가 모두 동의해도 막상 실행 단계에 들어가면 각자 우선순위와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HBR은 가짜 합의가 추상적인 목표를 논의할 때 발생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혁신을 가속화하자’거나 ‘매출을 늘리자’ 같은 큰 방향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하자’는 목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사업에 얼마를 먼저 투자할지, 기존 업무 가운데 무엇을 없앨지 등 안건을 세분화하면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갈등을 꺼리는 조직문화도 가짜 합의를 부추긴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조직에서는 참석자가 적극적으로 이견을 제기하기보다 동의하는 척한다는 사례가 많다. HBR은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가 자신의 의견에 실제보다 더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경향이 있다”며 “참석자들이 회의에서 의견 차이를 덮어두려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 ‘가짜 합의’ 막으려면
회의의 목적은 가짜 합의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합의를 이루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기업 문화 전문가인 제이슨 리치먼드는 모든 회의가 시작되기 전 두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의 목적’과 ‘결정 사항’이다. 리치먼드는 “실질적 안건 없는 회의는 단순히 진행 상황만 공유하는 만남이 된다”고 말했다.
주얼리 업체 판도라는 회의 혁신에 성공한 사례다. 2019년 판도라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알렉산더 라식은 회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46개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이틀간 워크숍을 열면서 목표를 ‘46개 현안을 논의한다’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12개로 줄인다’로 설정했다. 회의가 끝날 때 반드시 내려야 할 결정을 미리 제시한 것이다. 올 3월 CEO 자리에서 물러난 라식은 지난 7년간 판도라의 실적 개선과 종합 주얼리 브랜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장치도 필요하다. 참석자들이 동의를 빠르게 이끌어내는 것과 생산적인 회의를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영국의 임피리얼칼리지 연구진은 의견 차이를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라고 제안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이 접근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식이다.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리더가 반대 의견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상사가 발언을 줄이고 회의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것 또한 방법이다. 포브스는 “리더가 말을 많이 할수록 회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대화를 독점하지 말고 참석자들이 의견을 내고 발언할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로버트 서턴 스탠퍼드대 조직행동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효과적인 회의의 적정 인원은 5~8명이다. 이보다 많으면 토론이 사라지고 피상적인 의견 교환에 그칠 가능성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