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사진=한경DB
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의 최대 수혜국으로 떠올랐던 한국이 가장 먼저 AI 투자 열풍의 후폭풍을 겪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된 증시 구조에 개인의 레버리지 투자가 겹치면서 반도체 업황 우려가 시장 전체의 급락으로 번졌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29일(현지시간) 한국을 “국가자본주의와 시장 투기의 극단이 뒤섞인 거대한 실험”이라며 “AI가 약속한 부를 가장 먼저 맛본 국가가 이를 가장 먼저 빼앗길 수도 있다”고 했다.

AI 투자로 발생한 막대한 자금은 한국 증시를 끌어올린 핵심 동력이었다. 알파벳과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는 데이터센터 건설에 거액을 쏟아붓고 있다. 반면 AI 반도체를 공급하는 엔비디아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는 현금이 몰렸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기업 역사상 가장 큰 국경 간 현금 이전 중 하나”라며 “미국 실리콘밸리의 미래를 향한 도박으로 한국에서 실제 부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했다.

3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와 코스닥은 최근 고점 대비 각각 40.4%, 47.6% 하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낙폭은 각각 44.7%, 55.7%에 달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의 손실은 더 컸다. 삼성전자 레버리지 ETF는 고점보다 74.7%, 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는 84.2% 급락했다.

실적은 6배 늘었는데 주가는 추락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증시 급락의 근본 원인으로 메모리 반도체 호황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꼽았다.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보급으로 메모리 수요가 2030년대까지 공급을 웃돌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지만, 생산업체의 증설이 결국 공급 과잉을 불러 가격과 이익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6배 증가했는데도 주가가 한 주 동안 20% 넘게 떨어졌다. 삼성전자 주가의 변동성도 닷컴버블 당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커졌다고 전했다.

두 회사가 막대한 이익을 내면서도 지난 1년간 평균적으로 한 자릿수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에 거래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가파른 주가 상승에도 두 회사의 PER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며 “투자자들이 이익이 이미 정점에 도달했거나 정점에 가까워졌다고 본다는 의미”라고 했다.

개인의 공격적인 투자도 낙폭을 키운 요인으로 지목됐다. 증시 상승기에는 은행과 보험사에 있던 가계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이동했고, 지난 4월에는 개별 종목의 하루 수익률을 배수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까지 출시됐다. 상승장에서는 수익을 키웠지만 주가가 꺾이자 손실과 반대매매를 동시에 확대했다는 지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불과 몇 주 전까지 시장을 끌어안던 정부가 이제는 시장에 사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며 “정치권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이용을 강하게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중국 추격에 장기계약도 안심 못 해

사진=REUTERS
사진=REUTERS
앞으로의 위험으로는 중국 메모리업체의 추격을 꼽았다. 중국 기업이 범용 메모리 시장점유율을 높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격 경쟁에 내몰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기업의 범용 메모리가 중국 경쟁사의 추격을 받고 있다”며 “미국 AI 모델 업체 역시 중국 오픈소스 모델로부터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고객사의 장기 구매 약속도 예상만큼 단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선수금과 가격 조건이 포함된 장기계약을 근거로 수년간의 실적을 예측할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업황이 꺾이면 고객사가 계약 물량을 줄이거나 조건을 다시 협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엔비디아의 대규모 투자와 지급보증도 시장을 완전히 안심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행보를 “시장에 개입하는 중앙은행과 같다”며 “그가 더 많이 개입할수록 투자자는 더 불안해지고, 결국 거품이 터질 때 충격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박주연 기자 grumpy_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