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가 매 분기 사상 최대 실적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1980년대 일본 반도체처럼 미국 통상 압박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1980년대 일본 반도체에 날을 세운 방식 그대로 2026년 한국 반도체를 상대로 공세를 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22일 미국 상원 재정위원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수지 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관세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9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 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의 잇단 발언은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자국 밖에서 막대한 이익을 내는 데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美 '원투펀치'에 쓰러진 日 NEC·도시바…삼전닉스에 재연될까
애플과 퀄컴 등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최근 공개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메모리 가격 급등이 물가를 끌어올린다면 미국 정부가 1980년대 일본에 강요한 플라자합의(1985년)와 미·일 반도체 협정(1986년) 수준의 통상 압박을 한국에 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당시 미국은 플라자합의로 엔고를 유도했고 이듬해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D램의 가격 경쟁력을 무력화했다. 이 때문에 일본전기(NEC), 도시바 등 일본 기업은 글로벌 반도체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5일 “지금 메모리 가격은 비정상적”이라며 “가격이 떨어지지 않으면 옛날 일본과 똑같은 상황을 겪을 수 있고 미국이나 중국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겪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응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당시 일본은 기술력과 제조 역량 강화에만 몰두하다가 생태계에서 고립돼 미국의 표적이 됐다.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생태계에서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기업의 기술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美가 AI시대 열고 돈은 韓이 벌어"…빅테크 불만에 美 정부 나설 수도
반도체 高관세·가격 상한제 우려

1980년대 일본 반도체산업은 최절정이었다. 일본전기(NEC), 도시바, 후지쓰 등 일본 기업은 압도적 기술력과 낮은 가격을 무기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했다. 수십 년간 이어질 것으로 여겨진 일본 반도체 전성기는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화 가치를 끌어올려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낮춰버렸다. 미국은 이듬해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산 D램에 최저 가격 규제를 적용했고,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 비중을 20%까지 높이도록 했다. 일본 반도체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 빈자리는 삼성전자 몫이 됐다.

◇“미국 불만 커져…고강도 제재 가능성”

40년이 지난 2026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일본 반도체 기업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바뀌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 경쟁력으로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강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은 40년 전보다 더 커졌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이 자유진영 수장이자 자유무역주의의 수호자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

한·미 간 반도체 통상 마찰 가능성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최근 미국 소비자와 일부 정보기술(IT) 기업은 메모리 가격 폭등을 이유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를 상대로 가격담합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메모리업체들이 과점적 지위를 악용해 범용 D램 생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단가를 인위적으로 올렸다는 주장이다.

글로벌 빅테크 수장들도 공공연하게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치솟는 메모리 가격이 전체 IT 생태계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 빅테크 거물은 한국 반도체기업 CEO와 만난 자리에서 “인공지능(AI) 시대는 미국 기업들이 열었는데, 정작 돈은 한국 기업이 벌고 있다”는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빅테크 수장들이 미국 정부 인사들에게 반도체 가격 급등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제재가 현실화한다면 대미 투자를 강제하기 위해 메모리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인위적인 가격 상한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신창환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직접 관세를 높이거나 슈퍼 301조 등을 활용해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한 반도체장비업체 관계자는 “미국이 반도체 관세나 다른 산업과 연계한 무역 압박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고율 관세나 가격 통제 카드를 꺼내 들면 한국 기업의 수익성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엔비디아, 구글, 메타, 애플 등 미국 빅테크가 한국 메모리 시장의 압도적인 ‘큰손’이기 때문이다. 최종 구매 결정권을 쥔 미국 빅테크 시장이 흔들리면 국내 반도체 생태계 전체가 휘청일 수밖에 없다.

◇“美, 현실적으로 제재 어려워”

현실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향해 1980년대식 초강수 제재를 감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미국이 한국산 메모리에 관세를 매기거나 규제하면 오히려 중국 기업이 혜택을 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반도체에 고율 관세를 부과해 IT 제품 가격이 급등하면 미국 소비자의 불만이 팽배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이 자국 AI산업에 자해 행위를 하면서 중국을 살려주는 선택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그 비용을 결국 미국 소비자와 빅테크가 뒤집어쓰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당장 HBM 같은 메모리를 대체하기 힘든 만큼 제재를 가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슈퍼을’ 지위를 더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1980년대 일본이 머뭇거릴 때 한국이 과감하게 선제 투자해 주도권을 가져왔다”며 “HBM 같은 초격차 기술로 한국 메모리가 없으면 AI도 불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투자를 이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채연/강해령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