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음지서 확산해
2010년부터 바다 건너
싱가포르서 번지기 시작
테일러 아담·찬두 등 주목
1920년 미국은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한 명분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 미국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경제·문화적 부흥기를 누리게 된다. 이때 도심 속 음지에서는 불법 주점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 문화가 번지는 효과를 동반했다. 법 단속을 피해 벽 너머 은밀한 공간에 바를 차려놓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드나들기 위한 암호 장치들이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졌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정점에 치달은 1933년, 금주령이 막을 내리면서 스피크이지 바 문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2000년대 들어 뉴욕에 다시 등장한 모던 스피크이지 바 문화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색적인 경험 콘텐츠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는 이내 뉴욕처럼 미식 문화가 발달한 홍콩과 도쿄 같은 글로벌 허브 도시에도 퍼져나갔다. 서울도 주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인다.
2010년부터는 금주령만큼 엄격한 규범의 나라 싱가포르에서도 번지기 시작했는데, 통제사회로 질서가 유지되는 싱가포르에서 꽃피는 스피크이지 바는 금지된 사랑만큼이나 매혹적이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 하이난계 바텐더 응이암통분(嚴崇文)이 호텔의 주요 손님이었던 영국 여성들을 위해 트로피컬 음료수로 위장한 진 베이스 칵테일을 개발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 스피크이지 바에서 음료수를 위장한 다양한 칵테일이 개발됐던 것도 동서양을 막론하여 금지가 낳은 보석이라 할 수 있다.
챕터로 구성된 메뉴 또한 예사롭지 않다. 2021년 오픈부터 매년 두 번 씩 새로운 챕터를 내놓는다. 무역과 여행의 풍부한 역사에서 얻는 영감을 기반으로 동남아 테마가 챕터 10으로 이어지고 있다. 각 챕터에서 인기가 많은 것들은 올 타임 페이버릿(All Time Favorite)으로 구분해 두는데, 시그니처 칵테일은 '카르페디엠'이다.
테일러 애덤의 'TA' 이니셜로 음각 도장이 찍힌 사각 얼음 위 가니시는 그레이프프루트 말린 껍질이 시크하게 올라간다. 카르페디엠의 화룡점정은 토치로 불을 붙인 시나몬 스틱이다. 시가처럼 연기를 퍼트리며 고독한 감성을 끌어낸다. 믹솔로지스트의 추천대로 불붙은 시나몬 스틱을 칵테일에 담그면, 스모키함이 입안으로 자욱하게 퍼지며 카르페디엠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테일러 애덤에는 비밀 출구도 있다.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VIBE 비스트로 싱가포르 퀴진 레스토랑'으로 탈출 동선이 디자인됐다. 100여 년 전 스피크이지 바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지역 특색을 융합시킨 표본이라 하겠다.
당시 싱가포르 강가 로버트슨 키(Robertson Quay)는 활발한 무역으로 분주한 부두였다. 아편 거래도 많았다. 오늘날 다채로운 미식 레스토랑과 트렌디한 바가 즐비한 곳으로 탈바꿈한 이곳의 중심부, 옛 부둣가에 '찬두(Chandu)' 스피크이지 바가 있다. 찬두의 믹솔로지스트가 귀띔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2023년 모던 스피크이지 바 찬두가 자리 잡은 곳이 19세기에 로버트슨 박사가 마피아 무역상들에게 제공했던 아편굴 자리라고 한다.
로버트슨 하우스 호텔 외벽 구석진 곳의 검은 벽면에 둥근 달빛 손잡이가 있는 미스터리한 문이 있다. 오른쪽 문에는 스파이홀이 있는데, 노크하면 작은 슬라이드 문이 열리고 매서운 눈빛이 나타날 것만 같다. 찬두는 말레이어로 아편, 힌디어로는 달을 뜻한다. 어둠 속 은밀한 둥근 달빛 손잡이가 찬두 테마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9세기 아편굴 테마 공간이다. 그림으로만 봤던 아편 파이프가 눈앞에 있는 몽환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전 세계에서 외식 문화가 가장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곳이자 통제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반발 심리를 항상 자극하는 금지의 도시 싱가포르. 여기서 꽃피는 모던 스피크이지 바 문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갈구하는 정신적인 은신처, 청개구리들의 놀이터에서 꿈틀대는 믹솔로지 창작활동의 전개가 기대되는 이유다.
류재도 파크앤비욘드 크리에이티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