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중 한 곳인 워너브러더스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 1억 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100억 원을 투자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부기 나이트>(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데어 윌 비 블러드>(2006) <마스터>(2013) <팬텀 스레드>(2018) 등 만들었다 하면 걸작 아니면 명작 아니면 수작이요, 근데 오락성과는 거리가 멀어 흥행 성적은 완성도에 못 미치는 감독의 작품이라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이다. 카레이싱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20년간 구상해 온 프로젝트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숀 펜에, 베니시오 델 토로에, 과연! 이 셋이 추격전을 벌인다는 태그라인만으로도 어떤 면에서는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와 발 킬머의 <히트>(1996)가, 하비에르 바르뎀과 조쉬 브롤린과 토미 리 존스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이건 단순 비교가 아닌 게 실제 스크린에서 만난 적 없는 대배우가 서로 추격전을 벌인다는 점에서 그렇고, 사막을 배경으로 돈가방은 아니지만, 딸을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며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스티븐 J. 록조(숀 펜)는 한쪽이 죽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빈센트 한나(알 파치노)와 닐 맥컬리(로버트 드니로)의 관계이자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의 사이다.

이들이 언급한 두 영화의 앙숙과 다른 건 밥과 스티븐의 악연이 16년의 세월에 걸쳐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밥은 혁명을 외치는 ‘프렌치75’ 일원으로 감금된 불법 이민자를 풀어준 전력이 있고, 스티븐은 수용소의 최고 지휘자로 감금 시설이 뚫린 데 책임이 있다. 이 좋지 못한 인연의 줄다리기에 출발 신호를 알린 건 ’프렌치75’의 리더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다. 퍼피디아는 작전이 성공할 때면 섹스를 하듯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래서 밥과 사랑했고, 결혼도 했고 섹스도 했다. 그리고 밥은 딸의 아버지가 됐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내가 너의 아버지다. I’m your father’ 근데 16년이 지나 스티븐이 밥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납치해 자신이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16년 전 불법 이민자 수용소에서 스티븐은 퍼피디아에게 인질로 잡힌 적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일로 복수심을 느낄 텐데 스티븐은 퍼피디아의 용맹함에 그만 성적인 쾌감을 맛보고 만다. 그녀를, 아니 그녀와 관계하는 걸 사랑하게 됐고 퍼피디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몸을 섞으며 윌라를 잉태하게 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랑에, 변태 같은 스티븐 같으니라고.

미국 폭력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는 ‘두 명의 아버지‘ 테마를 미국의 기원과 결부하고는 한다. 새로운 삶을 개척한 아버지의 이면에 비(非)백인을 약탈하고 살육한 일그러진 아버지의 정체. <스타워즈> 시리즈는 이 장르의 신화 같은 작품 아니던가.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처럼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윌라는 밥의 과보호 속에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공수도를 배우고 있는데 ‘센세 (せんせい)’, 한국말로 하면 사부로 칭하는 이는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실제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세르지오 캐릭터를 두고 <스타워즈>와의 친연성을 드러내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세르지오가 “자유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란 대사를 한다. 그게 바로 내 캐릭터가 잊고 있던 것이다. 세르지오는 ‘오비완 케노비’ 같은 존재로 밥이 다시 자신이 믿도록 돕는다. 퍼피디아가 스티븐에 잡혀 사라진 16년 동안 밥은 딸 윌라를 양육하겠다며 혁명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숨어지내며 배 나온 아저씨로 전락했다. 그때 도움을 주는 이가 오비완 케노비이자 사부인 세르지오다.

16년 전이라면 실제 미국이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강대국의 지위를 서서히 잃어간 시기와 얼추 들어맞는다. 그동안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다스 베이더’를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으면서 혐오와 배제와 폭력으로 다크 포스를 드리우며 자국은 물론 전 세계를 위기에 빠뜨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티븐은 그래서 흑인인 퍼피디아와의 사이에 생긴 윌라를 찾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됐다. 순수 백인 혈통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로 자신의 출세와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까닭이다.

미국 원제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끝나지 않은 전쟁 (One Battle After Another)을 뜻한다. 건국부터 트럼프 시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는 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 명의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를 둔 윌라는 제다이이고 리더이자 무엇보다 백인이 아닌 여성이다. 개척의 아버지 밥은 미국이 서서히 몰락했던 지난 16년 동안 나태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윌라를 지키겠다고, 폭력의 아버지 스티븐은 백인 남성만의 세계를 고수하겠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추격전을 벌인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카레이싱으로 묘사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압권이다. 서부극의 모뉴먼트 밸리가 생각나는 캘리포니아 보레고 스프링스의 78번 고속도로 인근의 안자 보레고 사막 주립공원 도로는 물결처럼 굽이치는 구간이 연속되어 ‘언덕의 강 (River of Hills)’이라고도 불린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IMAX와 70mm 필름과 같은 대형 포맷에 최적화된 비스타비전으로 이 장소에서 자동차 추격전을 찍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도로의 언덕을 넘을 때면 출렁이는 자동차의 움직임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이 장면은 왜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 자각하게 한다.

혹자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클라이맥스를 두고 미친 영화라는 인상과 함께 ‘매드맥스: 부녀의 도로’라는 재치 있는 한 줄 평을 남기기도 했다. 눈을 황홀하게 하는 이미지에, <스타워즈>를 비롯해 여러 위대한 영화를 현재로 소환하는 연출력에, 대배우들이 펼치는 연기 배틀에, 현재의 미국을 향한 신랄한 비판까지, 폴 토마스 앤더슨은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데 자신의 영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오락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워너브러더스가 왜 거액을 투자했는지 작품으로 설득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허남웅 영화평론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1차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