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한미 '밤 끝으로의 여행'
리안갤러리 서울 '무한함의 끝'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을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었다.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로 인정받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 얘기다. 사진의 단짝인 어둠도 마찬가지로 찬밥 신세였다. 욕망과 공포, 무질서, 악 등 부정적인 개념과 연결 지어지며 서구 철학사에서 폄하되곤 했다.
사진과 어둠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전시들이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뮤지엄한미 '밤 끝으로의 여행', 리안갤러리 '무한함의 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사진전은 인간의 어둡고 은밀한 내면을 촬영한 대작들을 공개했다. 그동안 주류 예술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진의 방대한 가능성, 그 '끝'을 살펴본다는 취지에서다.
낮 동안 억눌린 '어두운 욕망'을 촬영하다
'밤 끝으로의 여행'은 사방의 빛이 차단된 암실에서 출발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 작은 불빛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야행성 동물처럼 한껏 예민해진 시야에 '애니멀로그램' 연작이 들어온다. 영국 사진작가 자나 브리스키(1966~)가 사마귀와 나방, 여우 등 야간 숲속의 포유류와 곤충을 기록한 작품이다.
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의 전시는 이처럼 '밤'을 주제로 국내외 사진 거장 32명의 작품 100여점을 살펴본다. 1900년대 초반 고전부터 컨템포러리까지 지난 20년간 뮤지엄한미가 수집해온 작품들이다. 구본창(1953~), 김재수(1929~2006), 만 레이(1890~1976), 브라사이(1899~1984) 등 하나같이 유명 작가들이다.
'욕망'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다. 낮 동안 억눌려 있던 욕구가 어둠과 함께 격동적으로 분출하는 듯하다. 꽃잎, 달걀이 든 유리그릇, 깃털, 조개 등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연상하는 피사체들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손안에 속박된 듯 묘사한 제리 율스만의 '포토몽타주'도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김태동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적막한 새벽의 어스름에 마주친 인간 군상을 촬영한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연작을 통해서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듯한 가로등, 바닥에 동심원을 형성하는 표지선 등 사진의 속 구성요소는 각각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한다.
주류 예술 향한 사진의 '반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열린 '무한함의 끝'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거듭나는데 기여한 상징적인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국내 작가 고명근, 권부근부터 신디 셔먼, 칸디다 회퍼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사진 작업 21점을 전시하면서다. 사진에 회화적인 성격을 가미한 예술사진부터 연출사진, 개념사진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 속에서 이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기괴하게 분장한 광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 현대 사진계의 가장 입지적인 인물 신디 셔먼의 '광대'(2003~2004) 시리즈다. 촌스러운 의상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여성 같으면서도 목젖이 돌출된 듯한 연출은 화면 속 인물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미학적 아름다움과 사회 참여적 메시지, 예술사적 가치를 두루 갖췄다는 점에서 셔먼의 작품은 매년 사진 경매 최고 가격대에 낙찰된다. 침대에 누운 작가 본인을 촬영한 '무제'(1981)가 대표적이다. 지난 2021년 추정가인 200만~300만달러를 훌쩍 넘어선 315만달러(약 43억원)에 새 주인을 만났다.
전시장 지하 1층에 걸린 '최후의 반란'(2005~2006)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 작가그룹 AES+F이 연출한 대표작이다. 전쟁과 살인, 화산폭발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을 영국 로열발레단 소속 청년 모델들이 재현했다. 자극적인 주제와 대조되는 정갈한 화면이 이질감을 자아낸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