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에 와 있는 봄의 기운을 느끼며 녹동항 너머 소록도, 소록도 너머 거금도를 여행했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듯 흐리고 허망했던 삶을 기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사한 고흥의 빛깔을 가슴에 꼭 담아 기록한다.
고흥 녹동항
고흥 녹동항
고흥반도 끝자락의 녹동항에는 매일 저녁 소록대교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떨어진다. 방파제 끝에 두 개의 등대가 견우와 직녀처럼 마주 서 있고, 파란 바다에는 금빛 태양이 오작교처럼 넘실댄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이 이러한 풍경을 가슴에 담으러 여행을 떠난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반복되는 일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고픈 일탈이다. 그래서 더더욱 알지 못했다. 나의 소란한 하루가 타인의 아픔보다 커서 소록대교 너머 자유를 잃은 채 영혼을 짓밟힌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지난 2009년 3월 정식 개통한 소록대교는 길이 1160m로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다. 소록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를 헤아리면 대교의 건설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다리가 놓인 덕에 소록도 가는 길은 아주 편리해졌고, 이웃한 거금도까지도 쉬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009년 개통한 소록대교,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다./사진=이효태
지난 2009년 개통한 소록대교,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다./사진=이효태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가 머물렀던, 아니 정확히는 갇혀 지낸 곳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비극과 슬픔의 공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록대교의 개통에서도 알 수 있듯 이제는 다크·헤리티지 투어리즘으로도 조명받아 매해 수많은 사람이 소록도를 찾는다. 모든 아픈 역사 앞에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눈은 먹먹해지기 마련인지라 소록도는 보통의 여행지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기도 하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해안 덱을 따라 소록도로 향한다./사진=이효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해안 덱을 따라 소록도로 향한다./사진=이효태
몇 년 전 코로나19가 막 발생했을 때를 상기하면, 그 시절 한센병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유지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1966년 정부의 한센병 관리 일원화 계획에 따라 전국의 한센병 병원은 폐쇄되었고, 국립소록도병원은 국내 유일무이한 한센병 전문병원으로 발전해 한센병을 앓고 있거나, 앓았던 이들의 치료와 재활, 사회 복귀까지도 돕는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에서 한센병에 대한 바른 이해와 소록도 주민의 한 맺힌 삶을 엿본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에서 한센병에 대한 바른 이해와 소록도 주민의 한 맺힌 삶을 엿본다.
현재 병원 직원과 주민들이 사는 마을 공간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이 외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한센병으로 얼룩진 소록도의 상흔을 마주할 수 있다.

유전되지 않아요. 치료돼요

바다를 옆구리에 낀 해상 덱(Deck)을 걷는다. 좌우로 우람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소록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어느 근사한 휴양림 가는 길 같기도 하다. 소나무가 우거진 이 길은 탄식의 장소라고 하여 ‘수탄장’이라 불린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는 부모들의 생활공간과 떨어져 지내야 했기에, 한 달에 한 번 수탄장 양 끝에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봐야 했다. 아이를 낳는 것도, 기르는 것도 타인의 허락이 필요한 삶이 있다니 슬픔과 분통이 밀려온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분명 봄이 왔다고 했는데 소록도의 바닷바람은 제법 매섭다. 이름 모를 검은 새 떼가 바다를 도약해 소록도의 하늘을 항해한다. 새들의 뒤를 쫓아 이윽고 들어선 소록도의 안. 소록도병원 뒤의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한센병 환자들을 가둬둔 섬에 공원이라니 의아한데, 중앙공원은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도 아름다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는 지독히 비극적이다. 계급과 계층이 붕괴되며 서로 다른 이념이 충돌했고,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해 짓밟고, 갖지 못한 자는 지키기 위해 생을 걸었다.

나라를 뺏기지 않았다면 조금은 삶이 수월했을까? 소록도의 역사는 이러한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인간의 탐욕과 오욕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배우는 검은 교과서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공원 중앙에 세워진 구라탑에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희망을 염원한 그 옛날의 메시지는 이제 사실이 되었다. 한센병은 약물치료가 가능하며 유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던 시절에는 한센병을 앓는다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와 삶을 유린당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1907년 일본은 법률 11호 ‘나예방에 관한 건(나예방법)’을 제정했다. 외적으로는 자국과 세계에 문명 일등국이라는 이미지를 견고히 하고 내적으로는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수용해 쉽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소록도자혜의원이 세워졌고, 소록도에 수용된 사람들은 원치 않는 단종과 낙태 수술을 받고,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소록도 곳곳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당시 귀하디귀한 벽돌 건물이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섬에 세워진 것이다. 1933~1942년 소록도 4대 원장으로 재직한 스오 원장은 환자 위안장으로 쓰인 산책지를 대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으며, 공원 주변에는 벽돌공장을 지었다.
2022년 6월,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진 한센인 항일운동가 이춘상 의사 6·20의거 기념비,/사진=이효태
2022년 6월,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진 한센인 항일운동가 이춘상 의사 6·20의거 기념비,/사진=이효태
주민(한센인)들은 성하지 않은 몸으로 밤낮 벽돌을 굽고 다시 관사, 식량창고, 검시실 등을 짓는 데 동원되었다. 원장에게 대들면 감금실에 갇혔고, 나온 뒤에는 단종이 거행되었다. 소록도에서 죽은 한센인은 검시실에서 해부를 당한 뒤 화장당했다. 아…, 탄식만이 흐르는 아픈 어제다.
광복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던 소록도 주민 84명이 학살되었다. 지난 2001년 유골발굴 작업이 실시되었고 이듬해 그 넋을 달래는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사진=이효태
광복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던 소록도 주민 84명이 학살되었다. 지난 2001년 유골발굴 작업이 실시되었고 이듬해 그 넋을 달래는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사진=이효태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광복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던 주민 84명이 병원(소록도갱생원) 직원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대 초 토지와 농토를 약속받고 오마도 간척사업에 온몸으로 뛰어든 소록도 주민들은 정치, 편견에 휘말려 모든 노력이 물거품되는 결말을 맛봐야 했다.
한센병박물관의 유물, 결혼 후 1년 만에 한센병에 걸린 아들을 찾아 소록도에 온 어머니가 건넨 명주누비 바지저고리./사진=이효태
한센병박물관의 유물, 결혼 후 1년 만에 한센병에 걸린 아들을 찾아 소록도에 온 어머니가 건넨 명주누비 바지저고리./사진=이효태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위 일련의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조사로 6462명의 피해자를 확인, 지원에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의 피해보상에 관한 법 개정도 이뤄져 지난 2021년 4월부터 한센인 가족보상 청구가 진행 중이다.

금빛 대교를 지나 거금도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녹동항에서 소록대교를 지나 소록도, 소록도에서 거금대교를 지나 거금도에 닿는다. 면적 63.57㎢, 해안선 길이 54km로 소록도보다 14배 가까이 큰 거금도는 고흥반도의 늠름한 기상과 고흥의 푸른 기운이 섬 곳곳을 에워싸는 매력적인 곳이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신양선착장에서 배 타고 5분이면, 예술의 섬이라 불리는 연홍도에 당도한다. 마치 제주도의 우도를 방문하는 기분이랄까? 연홍도선착장에 발을 딛자마자 안내견을 자처하는 방울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객을 반긴다.
연홍도 마을 벽화와 길 안내해주는 방울이./사진=이효태
연홍도 마을 벽화와 길 안내해주는 방울이./사진=이효태
아니나 다를까, 연홍도를 한 바퀴 일주하며 곳곳의 예술작품, 포토존, 연홍미술관, 해안전망대까지 돌아보는데 처음 오신 손님이 잘 따라오는지 가다 멈춰서 돌아보는 방울이다. 연분홍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용한 어촌마을을 1시간 남짓 걸었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집 앞의 텃밭에는 노란 배추꽃이 피었다. 올해 첫 꽃, 봄이 왔구나! 다시금 거금도를 가는 배를 기다리며 방울이 털에 잔뜩 묻은 도깨비바늘을 떼어주었다. ‘작지만 용맹한 방울아, 길 안내해줘서 고마워.’
폐교의 재탄생, 연홍미술관./사진=이효태
폐교의 재탄생, 연홍미술관./사진=이효태
신양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김일기념체육관이 있다. 김일은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링 선수로 1970년대 우리나라 국민에게 영웅과도 같았다. 그의 활약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섬 중 제일 먼저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거금도에서 꼭 들러야 할 필수 코스 중에 거금생태숲이 있다. 산행은 약 1시간이면 충분해 몸도 마음도 가볍게 들르기 좋다. 거금생태숲은 난대 섬 지역의 주요 수종인 후박나무, 이팝나무, 소사나무, 참식나무 등 11종의 난대식물 자생 군락지로 이뤄져 있다.
알지만 알지 못한 소록도, 금빛 다리 너머 거금도 1박2일 고흥 여행
주요 시설 중 하나인 캐노피하이웨이에 오르면 122ha에 달하는 생태숲의 기운이 발끝에 닿고, 눈앞에는 수묵담채화 같은 바다에 크고 작은 섬과 완도, 거문도 일원이 손끝에 잡힌다. 생태숲 아래 소원동산에서도 고흥의 푸른 전망을 가슴 가득 담을 수 있으니 참고하자.

여정의 즐거움

mkr coffee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전국의 카페를 우연과 필연으로 방문하는 기자의 입과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카페. 고흥 출신 사장님은 호주의 카페에서 일하며 커피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커피에 대한 진심과 철학이 묻어나는 사장님의 응대는 모든 손님에게 공평해 마음도 훈훈하다. (라테 러버라면 따뜻한 플랫화이트 강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비봉로 177

녹동항 장어거리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언제 가도 활기에 넘치는 녹동항은 고흥의 변함없는 핫플레이스다. 바다를 거니는 녹동바다정원, 소록대교 너머로 펼쳐지는 일몰은 장관을 이룬다. 지난해 화제가 된 ‘녹동항 드론쇼’도 오는 4월부터 개최하니 고흥 여행이 더욱 설렌다. 여기에 빼놓으면 안 되는 것이 녹동항 장어거리. 일대 전문식당이 밀집해 있으니 구이, 탕, 샤부샤부로 장어의 맛에 빠지시길.
전남 고흥군 도양읍 비봉로 177 일원

신촌브루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사장님이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커피 맛을 볼 수 있어 카페 이름이 ‘신촌브루’다. 서울에서 오랜 직장 생활을 끝낸 사장님은 새 보금자리로 붐비지 않는, 눈앞에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을 찾던 중 지금의 공간을 발견했단다. 한때 이발소, 점방으로 사용한 건물은 이제 카페가 되어 가까이, 멀리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신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