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와르,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매리 카사트, 폴 세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들이 동시대를 살았고 인상주의라는 화파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라는 답을 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번 컬럼에서는 인상주의 미술의 슬픈 아이러니를 다뤄보려 하는데, 그것은 이 예리한 눈을 가진 인상주의자들이 모두 안과질환으로 고통받았다는 점이다. 그 중 모네, 카사트, 드가의 사례를 예시로 들어 시력의 저하가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 장애로 인해 그들 예술의 가치가 하락하는지의 문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9세기 후반기에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은 신화나 역사의 장면을 다루면서 공간과 형태의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당대 아카데미 화풍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양식으로 아티스트가 목도한 풍경과 인물을 소재를 다루었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윤곽선을 통한 형태감 대신 색의 사용을 중시하는데, 특히 작가의 아뜰리에가 아니라 야외에서 직접 사물을 관찰하여 섞지 않은 물감들을 사용해 거친 붓질로 순간적 인상을 그려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색과 빛의 진동을 느끼게 한다. 이는 이들의 관심사가 빛, 특히 자연광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과 풍경의 색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상주의 화가들이란 빛과 색의 시각효과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고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도판1] 클로드 모네, 수련연못, 1899.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판1] 클로드 모네, 수련연못, 1899.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판2]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1922, 휴스턴 미술관
[도판2]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1922, 휴스턴 미술관
특히 그 중에서도 클로드 모네 (1840-1926)가 가진 시각의 정확성은 화가들 사이에서도 감탄을 자아냈다. 폴 세잔조차 “모네는 그저 눈일 뿐이야… 하지만 맙소사, 얼마나 대단한 눈인지!”라 말한 바 있다. 그런 모네에게 1905년, 그가 65세 되던 해부터 불행이 찾아 드는데, 오래 유지해온 1.0의 시력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1912년에는 0.4, 1922년에는 0.1로 떨어졌고 이후에도 계속 악화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예리하던 색 지각력이 무뎌지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세상이 갈색, 흙색으로 보이게 되었다. 지베르니에 위치한 모네의 집에는 일본식 반원형 다리가 놓인 일본정원이 있는데, 그가 1899년에 그린 이 일본정원은 밝고 생생한 연두색, 녹색, 청록색, 보라색, 분홍색 등으로 채색된 반면 (도판1) 같은 위치를 그린 1922년의 그림은 색조를 낮춘 겨자색, 갈색, 수박색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은 (도판2) 모네의 색 감각의 변화를 증명하는 사례이다.

모네의 시력 문제는 백내장(cataracts)에 의한 것이었다. 눈의 검은자와 홍채 뒤에는 투명한 안구 조직인 수정체가 존재하여 렌즈처럼 굴절기관으로 작용한다. (도판 3 참조) 눈으로 들어온 빛은 수정체를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망막에 상을 맺게 되는데, 백내장은 이러한 수정체가 혼탁해져 빛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보이게 되는 질환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시력이 저하되고 사물이 뿌옇게 보이는 증상을 보이는데, 진행 정도에 따라 색상이 흐리거나 누렇게 보여서 파란색과 보라색처럼 같은 계열의 색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모네는 이러한 눈의 변화로 인하여 파란색, 녹색 등의 차가운 색감을 보는 것이 어려워졌으며 시야가 흐려지니 붓질이 거칠고 성글어지고 빛이나 가벼운 대기의 질감 표현이 사라지는 등의 화풍의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도판3] 눈의 구조
[도판3] 눈의 구조
모네가 백내장 진단을 받고 보인 반응은 잘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병을 부인하고 막연히 나아지길 바라는 한편 현 상태에 적응해 계속 야외에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눈으로 물감색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물감튜브에 색 이름을 큰 글씨로 적어 사용했고 팔레트 상 자신이 정한 위치에 각 색의 물감이 위치하도록 했다. 또한 백내장으로 인한 눈부심을 막기 위해 커다란 챙이 달린 밀집모자를 썼고, 채광이 세지 않은 새벽 혹은 해질 무렵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당연히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외그림이 점점 더 ‘불꽃에 휩싸인 지옥도처럼 보인다’는 평을 듣게 되자 그는 다급히 영국의 유명 안과의들을 찾아가 치료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미 이 시기 백내장 수술법이 개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하나같이 수술을 권유하지만 모네는 강경히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인상주의자 동료인 매리 카사트가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매리 카사트(1844-1926)는 미국 출신으로, 당대 몇 안되는 여성 아티스트였다. 여타 인상주의자들이 주로 야외풍경을 그린 것과 달리 그녀는 주로 어머니와 아이들의 그림을 그려 큰 인기를 끌었는데 1915년에 시력 문제로 인해 은퇴를 선언했다. 1893년 그림(도판 4)에서 보이던 단단한 형태감, 머리카락과 속치마 레이스 및 옷주름의 사실적 질감 표현이 1914년 그림(도판 5)에서는 거의 다 사라지고 거친 붓질 몇 개로 이루어진 추상적 입체감만 존재할 뿐이다. 카사트는 1900년에 당뇨병을 진단을 받았는데 이때 이미 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당뇨의 합병증 중 시력에 문제를 불러오는 질환으로 당뇨망막병증(diabetic retinopathy)이 있다. 고혈당 상태가 지속되며 망막의 미세혈관이 약해져 출혈이 생기고 새어나온 혈액 성분이 망막에 쌓여서 당뇨황반부종을 유발하거나, 망막에 산소가 부족하게 되면서 비정상적으로 연약한 미세혈관이 새로 생기는데 이 혈관이 증식하면 합병증으로 신생혈관 녹내장을 일으켜 결국은 실명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20세기 초반 그 치료에 있어 상당히 제한적인 의료지식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1911년에 쓴 카사트의 편지를 통해 그녀가 라듐(Radium) 치료를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1)

“나는 지금 병원에서 라듐 흡입 치료를 받고 있어. 오늘이 8번째 날인데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걸 견딜 수만 있다면 잘 나을 수 있을 거 같아.”

20세기 초 마리 퀴리(Marie Curie)가 발견한 방사성 물질 ‘라듐’은 소량만 추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색채도 신비로웠고, 비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현상을 발견한 탓에 라듐은 민간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었다. 라듐으로 백내장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논문까지 발표될 정도여서 라듐 흡입치료가 암암리에 시행되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마리 퀴리는 본인이 발견한 라듐 때문에 백내장과 재생불량성 빈혈에 시달렸다.

[도판 4] 매리 카사트, 해변의 아이들 1884,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도판 4] 매리 카사트, 해변의 아이들 1884,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도판 5] 매리 카사트, 야외 햇살 속 녹색 옷의 젊은 여성,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미술관
[도판 5] 매리 카사트, 야외 햇살 속 녹색 옷의 젊은 여성,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미술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카사트는 또다른 안구질환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백내장이었다. 카사트가 받은 라듐 치료가 오로지 당뇨만을 위한 것인지 백내장 또한 목표로 한 것인지는 확인이 불가하지만 흥미롭게도 1920년 미국 안과 학회지(American Journal of Ophthalmology)에는 백내장 치료에 라듐이 유효하다는 연구논문이 실려 있어 당대에 카사트와 같은 상황의 환자에게 안과의가 라듐 치료를 권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관찰된 31명의 백내장 환자 중 84.3%가 라듐 치료 후 병세가 호전되었고 특히 이들의 수정체 혼탁이 분명히 옅어졌으며 그 중 극초기의 백내장의 경우 혼탁의 흔적조차 없이 깨끗한 수정체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백내장 환자에게 라듐 치료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에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백내장의 경우 라듐에 노출되면 혼탁이 더 심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인지 1917년 오른쪽 눈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이후 오히려 수정체 뒤편의 혼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1919년 남은 왼쪽 눈 수술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녀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매일 눈이 더 침침해져. 글 쓰는 것도 눈을 피로하게 하네. 수술이 지난번처럼 실패로 돌아가 완전한 어둠 속에 살게 될까 봐 두려워.” 그리고 수술 후 그녀는 그 우려대로 더 이상 글을 읽을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실명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모네는 이 일련의 과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수술을 극도로 두려워 했지만 결국 1923년 1월 백내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수술 직후에는 붕대로 감았던 눈 주변의 소양증, 시야의 왜곡현상 등의 이유로 카사트처럼 자신의 수술 또한 실패했다는 생각에 몹시 절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차 수술 부위가 회복되고 1924년에 백내장 수술 후 맞추는 보정안경을 쓰면서부터 (도판 7, 이 안경은 다시 방 네 개짜리 럭셔리 아파트 가격에 맞먹었다!) 그는 정상 시력을 되찾고 파란색, 보라색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안과의에게 보낸 편지에 노란색과 붉은색이 전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불평하는 대목이 있는데, 현대의학의 백내장 수술처럼 정교한 교정효과를 누리진 못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의사는 노란색으로 틴트처리된 안경 렌즈를 처방해주었다.
[도판 6] 백내장 수술 후 안경을 쓴 모네
[도판 6] 백내장 수술 후 안경을 쓴 모네
[도판 7] 모네가 썼던 교정용 안경,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도판 7] 모네가 썼던 교정용 안경,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에드가 드가(1834-1917)는 이미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주 방위군 병사로 참전했을 때에 시력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오른쪽 눈에 맹점(망막에 시세포가 없어 물체의 상이 맺히지 않는 부분)이 있어 총을 조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73년 사촌여동생이 안염(ophthalmia)으로 인해 시력저하가 꾸준히 진행되어 실명하게 되는 것을 본 드가는 본인의 시력저하 또한 같은 경과를 걷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1880년대에 그는 시력 이상이 악화되어 중앙시(central vision)를 잃었는데, 이는 망막황반에 직접 자극이 주어져 일어나는 것이다.

드가는 당시에 맥락망막염(chorio-retinitis)라는 진단명을 받았는데 이는 망막질환을 통칭하는 19세기 용어로 단순 염증부터 노화로 인한 황반 이상을 아우르는 큰 개념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드가에게 황반변성(macular disease)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황반변성은 초기에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시력이 점차 악화돼 결국 실명에 이르고 마는 무서운 질환이다. 황반이란 망막의 중심부분에 해당하며 빛을 감지하는 기능을 가진 부위로, 변성이 오게 되면 빛을 보는 기능이 소실되고 중앙시에 이상이 생겨 직선이 휘어 보이는 왜곡이 일어나고 시야가 흐려진다. 그래서 드가는 점차 사라져가는 중앙시 대신 주변시(peripheral vision. 황반에서 떨어진 망막에 주어진 자극으로 일어나는 시각)에 의지해 보는 연습을 해야했다고 전해진다.
[도판 8] 정상 시각 황반변성으로 인해 중앙시를 잃었을 때의 시각 비교
[도판 8] 정상 시각 황반변성으로 인해 중앙시를 잃었을 때의 시각 비교
1874년 작 <리허설 무대>(도판 9)는 연습 중인 무용수들의 나른한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으로, 발레용 투투 치마의 주름표현이라든지 조명이 직접 내리쬐인 무용수의 견갑골, 콧대, 눈썹뼈 등에 밝게 빛나도록 처리하는 등 섬세한 명암처리와 디테일이 돋보인다. 그런데 망막질환이 심화된 이후 그린 1910년 파스텔화 작업(도판 10)을 보면 거의 스케치에 가까울 만치 무용수의 이목구비나 신체형태에 있어 명암 표시가 최소화되고 선이 거칠며 명암 표현을 위한 색의 사용이 매우 제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도판 9] 에드가 드가, 리허설 무대, 1874
[도판 9] 에드가 드가, 리허설 무대, 1874
[도판 10] 에드가 드가,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그린 두 무용수, 1910
[도판 10] 에드가 드가,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그린 두 무용수, 1910
모네, 카사트, 드가 모두 정상 시력을 가졌던 시기가 인상주의자로서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였고 안구질환이 심화되면서 기존의 화풍을 유지할 수 없어졌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이들의 후기 작업들을 단순히 안구질환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손상된 시각으로 본 세상을 그린 결과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이들은 각자 흐려져가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업활동을 하고자 노력했고, 변화된 조건에 적합한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나갔다. 재현적 예술을 위한 정교함과 기교를 잃은 대신 표현주의적 자유를 얻었다 하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들의 안구질환이 발현되고 화풍에 변화가 찾아든 1900년대 초반은 추상미술이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야수주의 작가들은 눈에 보이는 색을 대신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색을 채택했고 표현주의 작가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까지 적극적으로 왜곡했으며 입체주의자들은 하물며 대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했다. 인상주의자들의 (안구질환으로 고통받던 시기의) 후기 작품은 19세기의 재현적 예술과 20세기의 추상적 예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를 갖고있다. 자신에게 찾아온 장애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고뇌와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결과 완전히 새로운 예술의 마중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1] Marmor MF, Ravin JG. The Eye of the Artist. Saint Louis: Mosby;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