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 미술시장은 '바이어의 마켓'(Buyer’s Market)이 되어 좋은 작품을 좋은 조건에 사려는 ‘올드 머니’들의 장(場)으로 전환되었다. 패션에만 ‘올드 머니’가 있는게 아니다. 오랜 경험과 자본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여유, 경쟁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판단하는 그들의 안목은, 최근 유입된 ‘뉴비 컬렉터’들도 꼭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날 내가 평소보다 열심히 실황을 보고 있던 이유는 사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안중근의 유묵(遺墨)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5년만에 나온 것 같다. 미술시장에서 일한 15년 남짓의 기간 동안 안중근 글씨는 겨우 다섯번 봤는데, 나올 때마다 주목을 받았고, 높은 금액에 낙찰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새로운 기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고미술 시장 'Top of Top'은 이렇다. 그림은 단연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도자기는 달항아리 큰 것(40cm 이상) 아니면 청화백자 오조용충(아래 도판 참고), 고가구는 왕실용으로도 사용되었던 강화반닫이, 그리고 서예에서는 오늘 말하는 안중근의 유묵이다.

안중근 다음으로는 뭐가 잘 팔리는가? 시장에 꾸준히 수요와 공급을 일으키며 자리를 잡은 작가(?)들 중에서 거래량과 가격대를 고려해서 꼽아보자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추사 김정희와 정치인들.
정치인들 글씨는 인기순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그리고 정치인은 아니지만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 그다음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그 아래로 더 꼽아보자면 소전 손재형, 위창 오세창, 그리고 담원 정인보 정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서예 가격이 처참해서, ‘추사체’ 말고는 가격이 떨어지고만 있다. 10년 새 다들 반토막이 되어 박정희, 이병철은 2000만원대, 김구, 이승만의 글씨는 1000만원대 선에서, YS와 DJ는 몇백만원, 그 아래는 일단 백만원에서 시작하거나, 아니면 그 밑으로도 거래된다.
BGM처럼 경매 실황을 틀어놓고 일을 하다가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어 화면을 보니, 이런, 이미 시작해버렸다. Lot 65번 안중근의 유묵, 시작가는 5억이었는데, 이미 경매사 뒤 현황판엔 9억을 넘어 10억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10억! 이미 최고가 기록이었다. 요즘 경기도 어렵고, 서예의 인기는 날로 떨어져가서 한 7억 정도 예상했는데, 놀라웠다.
‘대충 이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하고 밀린 일을 하는데, 뭔가 다음 랏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 화면을 보니, 아직도 치열한 경합 중이었다. 5000만원씩 차곡차곡 15억을 넘어 16억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17억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눈을 뗄 수 없었다. 적은 돈이 아니기에 경매사는 응찰을 부추길 수도 없고, 반응이 빠르지 않다고 서둘러 끝내버릴 수도 없다.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부여해서 한 계단씩 같이 올라가야 한다. 멋지게 해내는 후배를 보면서, 누군지 몰라도 ‘이기는 편 우리 편!’ 응원할 수밖에, 그리고 ‘20억의 기록을 만들려나?’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낙찰가 19억 5000만원! 놀라운 숫자였다. ‘20억원을 찍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것은 딱 떨어지는 숫자에 대한 무의미한 강박이자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며, 불현듯 욕망의 근원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 경합이 빚어낸 숫자와 그 속에 담긴 열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치열한 경합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달렸던 것일까?
이미 10억원일 때부터, 다시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투자의 효용은 없어졌다. 어쩌면 세기가 변해야 수지 타산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돈 벌려고 사는 작품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를 그 어떤 이유로, 가지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결과다.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변하지 않을 가치를 소유하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러니까 ‘19억5000만원’이라는 이 숫자는 작금의 시대에 영웅 안중근의 정신을 얻고자 하면, 지불해야 하는 값인 것이다. 그렇게 영웅의 정신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글씨, 가장 비싼 서예 작품이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독 한국의 서예 시장에선 추사 김정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이템이 정치인과 유명인에 쏠려있다. 그 가운데엔 정말 명필(名筆)도 있고, 백범 선생처럼 독특한 필적의 글씨도 있으나, 인기(거래량)와 가격은 글씨를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길어야 열 글자 남짓일, 그 짧은 휘호에 담긴 정신을 사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