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살이 사실이라고 믿는 쪽은 세 가지 근거를 든다.
1.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포로로 있다가 영구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몸이 아팠고 3일 뒤에 죽었다는 건 너무 갑작스럽다.
2.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사람은 인조의 측근이었던 어의 이형익이었고 시체는 검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1645년 인조실록) 즉,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3. 인조는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으며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죽이고 손자들도 제주도로 보내어 죽게 만든 점. 인조의 이런 광기와 정황증거로 볼 때 독살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독살이 아니라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질병설이다. 소현세자는 중국 심양에 있을 때부터 질병에 시달렸고 계속 약을 받아 복용할 정도였다.
2. 귀국길에도 몸이 좋지 않아 중도에서 며칠간 요양을 하다 다시 출발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3. 본래 다른 어의들이 진료했으나 차도가 없자 이형익이 침을 놓아 상태가 호전되었고 소현세자 자신도 다 나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상태가 다시 나빠지자 이형익이 침을 놓은 것이다. 요컨대 당시의 의료기술 부족 탓이다.
4. 아들이 죽은 뒤 인조는 원래 허약체질인 아들이 며느리의 지나친 성욕으로 기력을 잃은 것이 원인이라고 강빈을 비난했다.

인조는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병자호란이 나고 남한산성에 갇혀 있을 때 인조를 사로잡은 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청 황제에게 엎드려 절하는 치욕의 항복의식을 치르고 대신 아들을 중국에 포로로 보냈다.
두 번째, 아들이 심양에 있을 때도 체류비용을 충분히 보내주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받은 땅을 경작하고 조선에서 들여온 물품을 팔면서 체류비용을 충당했다.
셋째, 아들이 일시 귀국했을 때도, 영구 귀국했을 때도 환영잔치 제대로 한 번 열어주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았다.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경제적으로도 뒷받침 하지 못하고, 넓은 품도 내어주지 못했으니 아들에게 면목 없는 아버지 맞다.
그런데 왜?

아들은 죽었다. 구실을 만들어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렸고 손자들도 귀양 보내 결국 다 죽게 만들었다. 그 뒤로 인조는 5년을 더 왕의 자리에 있었다. 이런 난리를 겪고 지켜낸 왕의 자리치고는 너무 짧았으니 인조가 안됐다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