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87), 박근형(83), 박정자(81). 1962년 각각 연극 ‘소’와 ‘페드라’로 데뷔한 신구와 박정자, 이듬해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박근형의 연기경력을 합하면 무려 182년이다. 세상이 다 아는 실력파 배우인 데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원로다 보니 한 명만 나와도 그 연극은 큰 화제가 된다. 이런 대배우 세 명이 다음달 한 무대에 오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가 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다.

○“마지막 기회란 생각에 출연 결심”

9일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작품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신구는 “평생 꼭 한번 해보고 싶던 연극인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다”며 “건강 문제 등으로 대사와 동선 등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하다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욕심을 냈다”고 말했다.
다음달 19일 개막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는 신구(왼쪽부터), 박정자, 박근형 배우가 9일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파크컴퍼니 제공
다음달 19일 개막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는 신구(왼쪽부터), 박정자, 박근형 배우가 9일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파크컴퍼니 제공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부랑자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도’라는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다.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한 이후 세계 각국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극계에선 모두가 배우는 ‘필수 고전’이다. 국내에선 1969년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이 1500차례나 무대에 올려 22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신구와 박근형, 박정자 모두 ‘고도를 기다리며’에 처음 도전한다. 신구와 박근형은 각각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연기한다. 신구와 박근형이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건 TV 예능 ‘꽃보다 할배’를 제외하고 처음이다. 박정자는 포조(배우 김학철 분)의 노예이자 짐꾼 럭키 역을 맡는다.

박근형은 “그동안 사실주의 연극 위주로 해왔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고 대사나 행동이 과장된 부조리극은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럭키와 고도의 심부름꾼으로 나오는 소년(김리안 분) 역에 여배우를 캐스팅한 게 특징이다. 국내에선 첫 시도다. 베케트는 생전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네덜란드의 한 극단에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그의 사후에 프랑스 법원에서 여성이 역할을 맡아도 베케트 작품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자는 “럭키 역을 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며 “배우는 남녀 구분 없이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두 달간 ‘원 캐스트’ 도전

이번 작품은 공연 기간 두 달간 ‘원 캐스트’로 무대를 올린다. 80대 원로 배우들이 두 달 내내 대체 배우 없이 모든 공연을 소화한다는 뜻이다. 20~30대 젊은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신구는 지난해 급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아 심장박동기를 착용한 상태다.

신구는 “내 진을 빼서 전부 토해낸다면 (체력적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박근형은 “다들 신구의 건강을 걱정하는데 (열정적으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고도’는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누군가에겐 간절히 기다리는 ‘신’이 고도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오지 않는 ‘자유’가 될 수도 있다. 신구는 “나에게 고도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오늘을 늘 꽉 채워서 살기는 어려워요. 대신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 부족한 무언가가 내일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그런 희망 때문이 아닐까요. 이 작품을 연습하면서 더욱 간절해진 생각입니다.”

공연은 서울 국립극장에서 다음달 19일부터 내년 2월 18일까지 열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