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겸 CEO 진솔 "악단도, 회사도 최고로 이끌고 싶어요"
지난 18일 지휘자 진솔이 서울 방배동 '플래직'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최다은 기자

“우리끼리 짜 놓은 판에 만족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낯선 것들과 부딪히면서 배우는 게 훨씬 저를 성장하게하죠.”

진솔(36·사진)은 클래식과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게임음악까지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차세대 지휘자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정통파 음악가다. 클래식 음악가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성악가, 아버지는 작곡가였다.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 인생을 선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진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2017년 음악 콘텐츠 스타트업 ‘플래직’을 세웠다. 플래직은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음악을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편곡해 무대에 올리는 기획사다. “어릴 때부터 주위에 음악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음악이 워낙 자연스러운 것이다보니 새로운 도전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는 26일부터 이틀간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리는 ‘시드마이어의 문명 심포니’ 공연에 지휘자로 선다. 문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컴퓨터 게임 시리즈다. 공연에서는 2016년 만들어진 ‘문명 6’의 대표 사운드 트랙을 편곡해 120여명의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한다. 프로그램에는 게임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그래미상을 받은 작곡가 크리스토퍼 틴의 작품 등 문명의 주요 테마곡이 포함됐다.

“문명 게임이 여러 나라와 역사를 다루다보니 배경 음악도 세계 각지의 전통 춤곡이나 돌림노래 등을 이용해요. 사실 매우 클래식한 음악이란 얘기죠. 이를테면 우리 나라는 아리랑 테마를 활용해 고대 중세 고전 현대까지 쫙 풀어가며 음악이 전개돼요.”
지휘자 겸 CEO 진솔 "악단도, 회사도 최고로 이끌고 싶어요"
지난 1월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포켓몬 더 오케스트라' 공연. 플래직 제공

진솔이 게임 음악 등을 무대에 올리는 회사를 차린 것은 그가 게임매니아였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 생활 모두 순탄치 않았던 학창시절에 리니지 라그나로크 카트라이더 등의 게임 세계에 몰입하며 위로를 찾았다.

“제가 좋아하는 게임을 제가 잘하는 음악과 접목해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요. 직원을 고용해서 월급주고 제대로 일을 하려니까 회사가 필요하더군요. 좋아해서 하는 일이어서인지 잠을 줄여가며 7년째 지속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진솔은 플래직을 통해 포켓몬, 라그나로크, 스타크래프트, 리그오브레전드, 가디언 테일즈 등 유명 게임 음악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수많은 ‘덕후’들에게 추억과 감동을 선사하며 클래식 공연과는 또다른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카트라이더 공연에는 아빠와 딸이 함께 오는 걸 봤어요. 아빠는 PC로, 딸은 모바일로 이 게임을 즐긴거죠. (공연을 통해) 부녀의 공감대가 이어진 것 같아 뿌듯했죠.”

진솔은 콘텐츠 음악이 오케스트라 곡으로 무대에 오르는 과정을 시스템화했다. 악보 검수, 편곡, 편곡한 악보 관리, 연주자 관리까지 하나씩 체계를 잡아갔다. 그는 이 과정에서 클래식을 공부할 땐 체감하지 못했던 저작권 문제에 대해서도 깊게 공부했다. 그는 “상업적인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문화가 자리잡지 않아 아직 사각지대가 많다”며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자부심은 저작권 문제를 100% 해결한 공연만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회사의 사업팀이나 마케팅팀, 법무팀 등과 협업하는 과정도 생소한 일이었다. 편곡하거나 지휘를 할 때도 일반적인 클래식 공연과 달리 타사와 지속적인 소통과 이해의 과정이 필요했다. “게임 콘서트 지휘는 영상 및 무대 연출을 고려해야 해요. 오페라 지휘와 비슷하지만 이 모든 연출적 요소를 원작 회사와 상의하면서 작업해야 한다는 점이 크게 달라요. 저와 직원들도 다 음대 출신이기 때문에 쉽지않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체계가 잡혔고, 제 주변과 후배들에게 더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는 스타트업 CEO에 이어 최근 방송 분야에도 새로 도전했다. 올해 말 방영 예정인 드라마 ‘마에스트라’의 총괄자문으로 배우 이영애의 지휘를 코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구국제방송교향악단과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지휘자를 맡고있으며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말러리안 프로젝트’와 고전음악 연주단체 ‘아르티제’를 계속 이끌고 있다.

“말러리안 프로젝트는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제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거죠. 지금 65% 정도 완료했어요.”
지휘자 겸 CEO 진솔 "악단도, 회사도 최고로 이끌고 싶어요"
지휘자 진솔. 플래직 제공

그가 지휘자를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일본 출신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연주 영상을 접하면서다. 영상 속 세이지가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지휘했는데 왜소한 몸으로 단원들의 열정을 끌어내는 그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고. 이후에도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들은 세이지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이끌어가는 일이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든 리더의 임무는 같다고 생각해요.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최고의 결과를 내도록 이끄는 것이죠. 지휘자와 CEO 모두에서 리더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싶어요.”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