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반항, 우리의 운명 - 박열과 후미코 이야기
난 도무지 세상에 빚이라곤 지지 않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였으니까. 출생신고도 없이 내팽개쳐진 아이.
“잘 들어. 넌 무적자야.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남들 하는 걸 다하려 드는구나.” 친할머니가 경멸을 담아 얼굴에 침을 뱉듯 한 말이었다.
남자들에게 기대보려 했던 노력도 허사였다. 아니, 얻은 게 있었다. 그동안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왔구나 하는 자각.
가네코 후미코! 이젠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사는 거야. 이상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또 다짐했다.

배워야 했다. 도쿄로 왔고 신문팔이, 노점상, 행상, 식모를 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사회주의자, 부르주아, 지식인, 종교인을 만났지만 그들 속의 저속함, 잔혹함, 파렴치함을 보았다.
가난했고 운명적으로 불운했지만 바로 그 덕택에 ‘나’를 찾을 수 있었고 삶과 운명에 대한 투쟁심과 반항심을 키울 수 있었다.

‘개새끼’. 조선인 박열이 쓴 시. 그 글을 읽으며 난 어떤 짜릿한 쾌감이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걸 느꼈다. 이 남자는 내가 가진 분노와 슬픔에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어떤 직감에 몸을 떨었다.
박열은 인간을 옥죄고 지배하는 어떤 주의도 불신했다. 법률, 종교, 도덕, 국가 간 약속은 강자가 쳐놓은 덫이라 여겼고 공산주의는 민중의 의사를 강제한다고 질색하고 사회주의 혁명도 믿지 않았다. 결국 또 다른 권력을 낳는 데 불과할 테니까. 그렇다고 순진하게 무권력, 무지배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고민한 바를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우린 연인이자 동지가 되었다. 나 또한 국가와 가부장이라는 가치관으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반항, 우리의 운명 - 박열과 후미코 이야기
우리의 목표는 히로히토 황태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난 국가의 상징인 천황이 보잘 것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려 했고 박열은 일본제국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의지를 보이고자 했다. 여러 경로로 폭탄을 입수하려 애쓰던 중에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터졌다. 10만 명이 지진으로 죽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내고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가권력이 하는 짓은 늘 이런 식이었다.

뒤이어 군대와 경찰, 자경단들이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학살했고 그 명분과 증거가 필요했기에 나와 박열을 체포했다.
우린 그들이 원하는 것 이상을 말해주었다.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고.
그렇게 대역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직업을 묻는 말에 “현재에 있는 것들을 때려 부숴버리는 것이 내 일”이라고 난 답했고 박열은 정신감정을 받으라는 말을 듣고 “대심원 판검사의 정신 상태를 먼저 감정해서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살려주든지 죽이든지 천황 맘대로 하라고 해. 난 적인 당신들에게 잡힌 거니까. 내겐 살아서 천황을 저주하든 죽어서 저주하든 똑같아.”
그건 내 생각이기도 했고 우린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재판관은 여러 차례 반성과 전향을 요구했다. 그들은 도무지 ‘불순하고’ ‘치명적인’ 우릴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우리들은 잔인한 운명에 순응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의 반항, 우리의 운명 - 박열과 후미코 이야기
사형이 언도되었다. 동지로서 함께 꿈꿨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연인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난 법정에서 외쳤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끝까지 시대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도 웃고 있었다.

후원자들이 감옥으로 음식과 물건을 넣어줄 때마나 박열 생각이 났다. 난 그들에게 말했다.
이것들을 박열에게 전해주세요. 그에게는 뭔가를 먹여주고 싶습니다. 나의 바람입니다.
세상에 빚이라곤 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의 사랑이라면 상관없었다.

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지만 1926년 옥중에서 노끈으로 자살했다. 박열은 22년의 세월을 견디고 1945년 10월 석방됐다. 그는 재일한국인들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영구 귀국해 교육사업을 준비했지만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평양에서 죽었다.
후미코의 유해는 지금 박열의 고향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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