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골프도 ‘신체 스펙’에 꽤나 영향을 받는 종목이다. 키가 크고 팔이 길면 그렇지 않은 선수에 비해 유리하다. 스윙 아크가 크기 때문에 멀리 날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다 가파른 각도로 아이언을 찍어 칠 수 있어 스핀 걸기도 쉬워서다.

하지만 24일(한국시간) 끝난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대회인 디오픈 우승자는 참가 선수 중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키 170㎝의 브라이언 하먼이었다. 그뿐 아니다. 나이(36)도 많고, 왼손잡이다. 골프는 거의 모든 인프라가 오른손잡이에게 맞춰 설계되기 때문에 왼손잡이라는 것 자체가 핸디캡이다.

하먼은 이날 영국 잉글랜드 위럴의 로열 리버풀GC(파71·7383야드)에서 열린 디오픈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4개와 보기 3개로 1언더파 70타를 쳤다. 최종합계 13언더파 271타로 김주형(21), 욘 람(29·스페인) 등 공동 2위를 6타 차로 따돌렸다. 2000년 타이거 우즈(48·미국)가 8타 차이로 우승한 이후 이 대회 두 번째로 큰 점수 차로 우승컵을 들었다. 상금은 300만달러(약 38억6000만원).

하먼은 그리 이름난 선수는 아니었다. 2014년 존디어 클래식과 2017년 웰스파고 챔피언십 우승을 끝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7~2018시즌 이후 지금까지 29차례나 톱10에 오를 정도로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우승이 없는 선수 중 가장 많은 톱10 기록이다. 세계랭킹은 26위. 이런 꾸준함 덕분에 PGA투어 플레이오프전인 페덱스컵에 12년 연속 출전한 대기록도 갖고 있다. 하먼은 “한동안 우승하지 못하고 36살이 되면서 ‘이제 우승을 못 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자신감을 준 것은 지난해 디오픈에서 만난 리 트레비노(84·미국)였다. 자신과 똑같은 170㎝의 신장으로 메이저대회에서만 6승을 따낸 골프 전설이다. 트레비노는 하먼에게 “우리 같은 사람이 장신들과 경쟁하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다”며 “다윗에게 돌멩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치핑과 퍼팅이 있다”고 강조했다. 짧은 드라이버 거리를 쇼트 게임의 정교함으로 극복하라는 조언이었다.

하먼은 조언대로 했다. 그의 이번 대회 평균 비거리는 283야드로 156명의 출전자 가운데 126위에 그쳤다. 하지만 페어웨이 적중률은 75%로 1위를 기록했고, 홀당 퍼트 수는 1.5회로 2위(커트 통과 선수 기준)에 랭크됐다. 3m 이내 퍼트는 59번 중 단 한 번만 놓치고 모두 성공시켰다. ‘드라이버는 쇼, 퍼터는 돈’이란 골프 격언을 절감시켜준 무대였다.

그의 취미는 사냥이다. 해마다 봄이면 엘크를 사냥해 직접 가죽을 벗긴다. 이 때문에 영국 매체들은 그에 대해 “미국에서 온 도살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먼의 사냥꾼 본능은 최종 라운드에서도 나왔다. 로열 리버풀GC 갤러리들은 하먼에게 적대적이었다. 영국대회인 만큼 동반자인 로리 매킬로이(34·북아일랜드)와 토미 플리트우드(32·잉글랜드) 응원 소리만 가득했다. 최종 라운드 1번홀에서 하먼이 티샷을 하자 “벙커에 빠져버려라”는 야유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누구나 응원하는 선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 같은 반응은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봄이면 사냥을 즐기는 하먼은 우승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자축할 계획이다. 그는 “사냥터 땅을 고르려고 얼마 전에 트랙터 한 대를 샀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 얼른 가서 트랙터를 몰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