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싫다"…재산 수천억 '금수저 엄친아'가 푹 빠진 일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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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의 후원자'
구스타브 카유보트
'금수저 편견' 딛고
작가로 미술사에 이름 남기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금수저 편견' 딛고
작가로 미술사에 이름 남기다

1877년, 비 내리는 프랑스 파리의 르 펠르티에 거리. 우산을 쓰고 걷던 남녀가 길가 전시장 앞에 멈춰 서서 수군댔습니다.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을 옮기는 인부들 사이에 유명한 부자인 구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양반이 가난하고 성병 걸린 화가들한테 전시비를 대 주고, 같이 어울려서 그림도 그린다며?” “그래, 인상파라는 그 이상한 그림 그리는 작자들 말이야. 급이 떨어지게 저게 무슨 짓인가, 쯧쯧….” 사람들은 혀를 차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말대로 카유보트는 ‘괴짜 금수저’였습니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거지꼴 화가들과 어울리며 용돈을 주고 그림을 사 줬습니다. 덕분에 그 화가들은 살아남아 훗날 인상파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카유보트 자신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장 작품을 팔아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처럼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전시 준비를 할 땐 직접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비가 오는 풍경을 특히 잘 그렸던 카유보트. 비 오는 날의 이 아침을 카유보트의 이야기로 열어 봅니다.

삶이 지루했던 부잣집 아들
‘노동은 신성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삶을 꿈꿉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일하며 보내야 하니까요. 직장인이 아니라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집안일이든 뭐든 항상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을 텐데. 카유보트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금수저를 넘어선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곳에는 르누아르, 모네, 마네, 드가와 같은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했고 행실은 불량했으며 화풍도 거칠었지만, 이들에게는 맨주먹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사람 특유의 에너지가 넘쳐났습니다.
이들이 내뿜는 삶의 에너지는 카유보트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저들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살아야 한다.” 카유보트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함께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들끓는 에너지는 딱딱한 살롱보다 파리 길거리의 인상파 전시장에 더 잘 어울렸습니다. 1876년 열린 인상파의 두 번째 전시회에 공식적인 참여 작가로 초청받은 것도, 인상파 전시가 열릴 때마다 적잖은 비용을 댄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일’을 빼앗긴 사람

평생 일할 필요가 없던 카유보트가 노동을 동경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상류층 화가로는 이례적으로 노동 계급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노동에 가까웠습니다. 아주 공을 많이 들여서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부자의 취미나 아마추어 수준이 결코 아니다.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그린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던 미술 평론가 구스타브 제프루아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874년 아버지와 1876년 큰동생, 1878년 어머니를 연이어 잃은 후 그는 더욱 그림에 몰입했습니다. 딱 한 명 남은 가족인 막냇동생을 제외하면, 카유보트에게 세상과 자신을 묶어줄 것이라고는 미술뿐이었습니다. 동료들도 계속 챙겨 줬습니다.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까지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려 출품하면서 르누아르를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 주고 용돈까지 따로 챙겨줬습니다.

점차 카유보트는 그림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막냇동생과 함께 우표를 수집하거나 보트를 타고, 직접 보트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분야에서 카유보트는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우표 컬렉션은 영국 최고의 우표 수집가에게 팔려 지금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카유보트가 설계한 보트 구조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쓰이는 것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랑했던 것들로 기억되다
1887년 곁에 있던 막냇동생이 결혼해서 새로 가정을 꾸리며 카유보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홀로 남은 카유보트는 모든 게 허무해졌습니다. 가족을 연이어 잃었을 때의 상실감, 죽고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인간관계에 대한 허무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카유보트는 지겨운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에 가려 노력과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카유보트. 하지만 세상을 떠난 뒤엔 달랐습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인상파 컬렉션은 루브르박물관에 기부됐습니다. 관련 업무는 유언에 따라 친구였던 르누아르가 도맡았습니다. 인상파를 극도로 싫어하던 당시 미술계 주류와 박물관 위원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일부 작품을 제외하는 조건으로 기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지금 루브르박물관의 대표 소장품들로 꼽힙니다.

그가 안간힘을 써가며 그리고, 전시를 열고, 어렵게 모으고, 열렬히 사랑했던 그림들은 사후 10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카유보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온화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요.
비오는 주말, 행복한 재충전의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에 나온 카유보트의 인생 전반에 대한 해석은 ‘Gustave Caillebotte as Worker, Collector, Painter’(Samuel Raybone)를 전적으로 참조했습니다. 이 밖에 기본적인 정보나 작품 해석 등은 ‘Gustave Caillebotte: The Painter’s Eye’(Mary Morton, George Shackelford)를 함께 참조했습니다. 당시 화폐 가치는 1프랑=2만원으로 일괄 계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2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