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틀에 갇히는 게 지독히 싫다"
'달항아리 = 우아·고요' 편견 깨
건축·미디어아트 등 장르 넘나들며
해외 곳곳서 작업하는 '자유로운 영혼'

‘세계적 거장’도 반한 예술여행자
모두 이헌정 작가(56)의 작품이다. 일반 대중에겐 생소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도예가다. 할리우드 톱스타 브래드 피트, 유명 골프선수 저스틴 토머스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헌정은 ‘예술가가 사랑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은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콕 찝어서 ‘이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뭐든지 좋으니 하나만 달라’고 했다.이헌정은 ‘도예가’란 단어만으론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부른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여행자처럼 건축,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등 여러 가지 장르를 넘나들어서다. 콘크리트로 조각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연출부터 출연까지 도맡은 영상 작품을 찍기도 한다. 작업실도 한두 곳이 아니다. 미국, 한국, 유럽을 수시로 옮겨 다닌다.
“어떤 틀 안에 갇히는 게 지독히 싫었어요. 한국의 작업실을 도예가들이 모여 있는 경기 이천이나 여주가 아니라 양평에 둔 것도, ‘무슨 무슨 예술가협회’에 한 번도 가입한 적이 없는 것도 그래서죠. 심지어 몇 년 전 미국 비자를 신청할 때 직업과 소속을 적어내야 했는데, 협회에 들기가 너무 싫은 나머지 미국 방문을 아예 포기한 적도 있다니까요. 하하.”
자유를 갈망하는 도예의 도발과 파격
그렇게 어디 한 곳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여행’을 다니던 그가 이번 전시에선 도예로 ‘귀환’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어 저니 투 리턴 홈(A Journey to Return Home)’으로 정했다. 하지만 여느 도예 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후대 사람들이 이 시기를 돌이켜봤을 때 ‘아무 발전도 없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두렵다”는 그는 달항아리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부수기로 했다.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귀환’(2023)이 그렇다. 소금 좌대 위에 놓인 달항아리는 죄다 갈라지고 찌그러져 있다. ‘달항아리의 미학은 완벽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온다’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달항아리가 지닌 전통적 권위에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달항아리를 물에 담아 얼린 후 전시장 안에서 녹이면서 깨진 흔적을 남겨둔 ‘무제’(2023), ‘달항아리가 꼭 순백색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형광빛 달항아리 작품 ‘자연을 모방하다’(2023), 관람객이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고 물레 작업을 하듯 원형을 반복해서 그리면 그 궤적을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가 생성되는 ‘손끝에서’(2023) 등 도발적이고 신선한 작품이 가득하다. 오는 8월 2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가 끝나면 이헌정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포르투갈에 있는 9개 섬에 작품을 설치하는 장기 프로젝트 때문이다.
“50대 중반이 된 지금, 새삼 중요성을 느낀 게 있다면 ‘자유’예요. 작년보다 올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 자유의 질량은 절대 퇴보하지 않는 것, 그래서 치열하고 도전적인 내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