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판타지를 적절히 섞어 영화를 만드는데, 그런 환상성은 단편이건 장편이건 그의 영화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이런 그가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에 매료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 같다.
시는 짧지만, 짙은 사랑의 정서를 담고 있는 데다가 판타지를 가미해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할 수 있을 듯한 감정상의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평소 '남해 금산'을 영화화하고 싶었던 김 감독은 그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영화의 컨셉을 그림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인공지능(AI)의 도움을 통해서다.
"약 4억개의 그림-글 관계를 확률적으로 미리 학습한" 인공지능 '달리'(DALE-E2)를 이용해 그는 이성복의 시를 시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김 감독은 우선 달리에게 시의 주인공을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달리는 1980년대 한국 B급 공포 영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무쉐뜨'(1967) 등에 나올 듯한 여성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달리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토대로 김 감독이 편집에 나섰다.
김 감독은 시 한문장 한문장을 시각화했다.
달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그림을 이리저리 붙였다.
김 감독은 "그림을 선택하고 다음 그림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은 시나리오를 쓸 때의 고민과 비슷했다"며 "글자로 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것,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것이 이 작업 안에 다 있었다"고 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신간 '생성 예술의 시대'(동아시아)는 예술가와 AI의 협업 과정과 그 결과물을 조명한 책이다.
김태용 감독을 포함해 아트디렉터 김도형, 안무가 김혜연, 영상작가 이완, 그리고 뇌과학자 김대식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