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마다 날 선 경고문구 가득…경매낙찰가율은 50% 수준
100여세대 거의 통째로 경매 넘어가기도…지원센터는 한산
[르포] 전세사기 진앙 미추홀구…피해자-경매업자 '전쟁 중'
'낙찰 장사꾼들 한번 해보자', '전세 사기 수사 중'.
18일 오전 10시 30분께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 아파트.
한 동짜리 아파트의 거의 모든 집 현관은 경매업자에게 보내는 날 선 경고 문구 스티커들로 가득 찼다.

아파트 1층 출입문과 엘리베이터 내부에도 '건물 전체 전세 사기 피해 아파트'나 '계약 주의' 등 문구를 담은 현수막이 자리 잡았다.

아파트 발코니 외벽을 따라서도 1층부터 12층까지 '전세 사기 보증금 반환하라'는 현수막이 길게 내걸려 있었다.

[르포] 전세사기 진앙 미추홀구…피해자-경매업자 '전쟁 중'
주민들은 경매업자들의 접근을 막고 혹시나 신규 입주자가 피해를 보는 일을 막기 위해 피해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과 종이를 아파트 곳곳에 붙였다.

아파트 동대표인 김병렬(45)씨는 "경매꾼들은 남편이 일하러 나가고 여성과 아기들만 있는 시간대에 아파트에 온다"며 "건장한 남자들이 와서 아파트에 들어오려고 하다 보니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아파트는 전날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전세 사기 피해자 A(31·여)씨가 세 들어 살던 곳이다.

2017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지난해 3월 A씨 전셋집을 포함한 전체 60세대가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

아파트가 거의 통째로 경매에 넘어간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근처 H아파트는 105세대 중 100세대가, 또 다른 아파트 역시 108세대 중 100세대가 경매에 넘어갔다.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리는 60대 건축업자(구속)가 한 동짜리 나홀로 아파트나 빌라를 곳곳에 신축한 뒤 세입자들의 전세금으로 건물들을 늘려갔기 때문에, 전세사기 피해 또한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이 함께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르포] 전세사기 진앙 미추홀구…피해자-경매업자 '전쟁 중'
아파트의 주민들은 경매에 넘어간 집이 낙찰되는 일을 막으려고 '경매 장사하는 당신도 가해자' 등 문구를 적은 현수막을 1층 출입문과 주차장 등지에 내걸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아파트 주민은 "집이 경매에서 낙찰되면 쫓겨나게 된다"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수막을 내건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아파트에 덕지덕지 붙은 경고 문구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피해자 모임인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대책위에 가입된 34개 아파트·빌라의 1천787세대 가운데 경매·공매에 넘어간 세대는 1천66세대(59.6%)에 달한다.

이 중 106세대는 이미 낙찰돼 매각이 끝났고, 261세대는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다.

경매업자들은 "아파트에 내걸린 경고 문구로 도리어 낙찰가격이 낮아져 고맙다"고 조롱하기도 한다고 피해자들은 주장했다.

실제로 법원 경매로 넘어간 피해자들의 주택은 감정가의 절반 정도인 저가에 낙찰된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 통계를 보면 최근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 주거시설 경매 낙찰가율이 올해 들어 50∼60% 선에 그쳤다.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돼 있고, 세입자가 끼어 있어 권리관계가 복잡하다 보니 유찰을 거듭하다가 결국 최저가가 감정가의 반값 이하로 떨어져서야 주인을 찾는 것이다.

한 주민은 "직접 낙찰받은 사람과 통화하고 경매장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경매꾼이 우리 아파트를 두고 '노다지'라고 말하더라"며 "그런 나쁜 XX가 어디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르포] 전세사기 진앙 미추홀구…피해자-경매업자 '전쟁 중'
계속되는 경매에 쫓겨날 처지에 놓은 주민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으나 이들을 위한 근본적 대책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지난 1월 말 부평구에서 국토교통부와 인천시가 문을 연 전세피해지원센터는 한산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오후 2시께 찾은 센터에서는 피해자 2명이 상담을 받고 있었을 뿐 대기석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센터는 그동안 총 807명(지난 12일 기준)의 전세 사기 피해를 접수했으나 법률상담을 한 게 622건으로 가장 많았고, 실질적인 지원으로 이어진 것은 긴급 주거 38건(입주 예정 30건 포함)과 대출 22건 등 60건뿐이다.

인천에 있는 긴급 주거 임대주택 238호 가운데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입주를 완료한 세대는 8호(3.36%)에 불과하다.

피해자들은 이들 주택이 규모가 작은 데다 기존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등 문제로 입주를 꺼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은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하는 무주택 피해자가 새로운 전셋집(보증금 최대 3억원 이하)에 입주하는 경우에만 받을 수 있어 요건이 까다롭다.

또한 대출·주거 지원을 받기 위해 피해 확인서를 발급받으려면 임차 주택의 경매 진행 등 여러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 관계자는 "절박한 처지에 놓인 피해자들을 현행 제도 틀 안에서 지원하기 위해 충분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전세 사기 피해 지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어 앞으로 추가 지원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센터에는 전문가들이 있어 피해자들과 함께 차선 대책을 함께 찾을 수 있다"며 "피해자가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센터에 찾아와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르포] 전세사기 진앙 미추홀구…피해자-경매업자 '전쟁 중'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