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골프(PGA)투어 WM피닉스오픈은 선수들에게 '골프 해방구'이자 '골프 시험대'와 같은 대회다. 로마시대 검투 경기장 '콜로세움'처럼 생긴 16번홀(파3)에는 2만여명의 갤러리가 들어와 고성과 야유를 마음껏 던진다. 어느 경기에서도 들을 수 없는 짜릿한 함성을 받을 수 있는 동시에 갤러리의 기세에 눌려 페이스를 잃을 수도 있다. '자신과의 싸움'인 골프에 '갤러리와의 싸움'이 더해지기는 셈이다.

스코티 셰플러(27·미국)가 이곳에서 2년 연속 새 역사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이 대회에서 생애 첫 승을 따내며 '무관의 강자' 타이틀을 떨쳐낸데 이어 올해는 대회 2연패와 함께 세계랭킹 1위까지 탈환했다. 로리 매킬로이(34·북아일랜드)에게 1위 자리를 내어준지 넉달만의 재등극이다.

셰플러는 13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TPC 스코츠데일(파71·7261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이글 1개와 버디 4개를 잡아내며 6언더파 65타를 쳤다. 최종합계 19언더파 265타로 2위 닉 테일러(35·캐나다)를 2타 차로 제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세계랭킹 1~3위가 총출동했다. 시작 전부터 "나는 지금 랭킹 1위다운 경기력을 펼치고 있다"(매킬로이), "세계랭킹은 알고리즘의 결과물일 뿐이다. 난 숫자 2보다는 1을 좋아한다"(셰플러), "지금은 실질적으로 내가 최고의 선수"(욘 람·27·스페인) 등의 견제구가 오갔다. 이번 대회 결과에 따라 랭킹 1위의 주인공이 바뀔 수 있기에 신경전은 더욱 치열했다.

스코츠데일의 선택은 올해도 셰플러였다. 이날 셰플러의 경기는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2타차 단독 선두로 경기를 시작했지만 티샷 난조를 겪었다. 그사이 테일러가 전반에만 4타를 줄이며 추격 속도를 높이더니 10번홀(파4)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공동선두로 쫓아왔다.

위기의 순간, 셰플러는 공격적인 플레이로 승부수를 띄웠다. 13번홀(파5)에서 2온에 성공한 그는 8m짜리 이글퍼트를 성공시키며 단숨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2만명이 지켜보는 16번홀(파3)에서는 4.5m 거리의 파 퍼트를 넣으며 선두를 지켜냈다. 반면 테일러는 2m 남짓한 파퍼트를 놓쳐 2타 차이로 밀려났다. 갤러리와의 싸움을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셰플러가 지난해 4월 마스터스 이후 10개월만에 우승포를 재가동시키면서 남자 골프는 본격적으로 셰플러-매킬로이-람의 '트로이카 시대'를 맞게 됐다. 이들의 세계랭킹 포인트는 각각 78점, 13점 차이. 다음 대회에서 세 선수 중 하나가 우승하고 다른 한명이 부진하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점수차다. 4위 캐머런 스미스(호주)는 3위 람과 100점 이상 차이나는데다 LIV골프 활동으로 세계랭킹 포인트를 올리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세 선수의 트로이카 체제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셰플러는 이날 우승으로 지난해의 좋은 기억을 다시 한번 재연할 준비를 끝냈다. 2020년 신인왕인 그는 지난해 이 대회에서 PGA투어 첫 승을 시작으로 한달만에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과 WGC 델 테크놀러지스 매치 플레이까지 3승을 몰아쳐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섰다. 여기에 '명인열전' 마스터스까지 우승하며 올해의 선수와 상금왕을 휩쓴 바 있다.

이번 대회에서 32위에 그치며 랭킹 2위로 밀려난 매킬로이도 언제든지 순위를 뒤집을 수 있는 강자다. '황제' 타이거 우즈가 아들 찰리에게 추천했을 정도로 완벽한 스윙을 구사하는 그는 독보적인 장타에 최근 퍼팅감까지 물이 올랐다. 여기에 올해 들어서만 2승을 올린 람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이번 대회를 단독 3위로 마친 그는 최근 출전한 8개 대회에서 2승을 포함해 모두 톱10에 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선수로는 임성재(25)가 공동 6위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날 하루에만 2타를 줄이며 최종합계 11언더파 273타를 에 오르며 2대회 연속 톱10을 기록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