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삶이지만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요.
"

오씨는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제주4·3 생존 희생자이자 4·3 후유장애인이다.
"보상금으로 끔찍했던 삶을 보상을 받을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이제까지 올 수 있도록 한 여러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오씨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제주4·3이 시작된 1947년에 태어나 생후 17개월이던 1949년 2월 1일 세 발의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70여년전 그의 몸을 찢은 총탄 자국은 그의 왼팔과 오른팔, 가슴팍에 현재도 남아있다.
그가 목숨을 건진 곳은 바로 학살의 현장인 성산일출봉 부근 성산포 터진목이다.
그 때 25살 엄마(현정생)는 갓난 아들만 남기고 총탄에 쓰러졌다.
그의 아버지(오명언)도 제주4·3 당시 집단학살 매장지인 제주공항에서 2014년 시신으로 발굴됐다.
오씨는 "나에게는 '삶이 고통'이란 말도 행복한 말일뿐, 그야말로 끔찍했다"고 장애인이자 고아로 산 힘겨웠던 73년의 삶을 되돌아봤다.
오씨는 "이웃의 도움과 할아버지·할머니 밑에서 철없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세상이 어떻게 되고 있다는 걸 알만한 나이쯤부터 방황이 시작됐다"며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도 젊은 시절 해봤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래도 '살 사람이라서 하늘이 도왔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하늘은 왜 내 인생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했을까' 원망도 했다"고 말했다.
10대 들어서부터 화장품 외판원, 건설 현장 막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결혼 후 중년의 나이에는 폐결핵을 앓고 죽을 고비를 또 맞았다.
그는 "아내의 지극정성으로 폐결핵을 이겨 냈다"며 "이제는 손자·손녀를 보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웃었다.
그는 70년 넘게 다들 기다려온만큼 다른 생존 희생자들과 유족들도 하루빨리 보상금 지급 결정이 날 수 있도록 서둘러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임종 제주4·3유족회장도 "제주4·3특별법을 마련해 진상조사를 한 후 대통령이 사과하고 또 보상 입법을 만들어 국가 보상까지 이르렀다"며 "이번 보상금 지급 결정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