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달러'에…해외기업 M&A '개점 휴업'
연일 치솟는 원·달러 환율에 올해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아웃바운드 M&A)도 ‘개점 휴업’을 맞았다. 연초 대비 환율이 20% 가까이 급등하며 한국 기업이 지급해야 할 가격이 덩달아 오른 점이 반영됐다. 새 성장동력을 해외에서 찾으려던 기업들도 연초 세웠던 인수 계획을 연기하거나 백지화하며 기회를 살피고 있다.

17일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인 마켓인사이트 집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국내기업이 해외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한 거래(1000억원 이상 기준)는 총 9건, 6조9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네이버의 2조원 규모 미국 커머스업체 포쉬마크 인수, SD바이오센서의 미국 진단키트 제조사 메리디안 인수(2조원), SK에코플랜트의 싱가포르 폐기물업체 테스 인수(1조2000억원) 등이 올해 이뤄졌다.

지난해 같은 기준으로 28건, 17조원 규모의 거래가 이뤄진 점과 대비하면 아웃바운드 M&A 규모와 금액 모두 급감한 모습을 보였다. 넷마블의 미국 소셜카지노업체 스핀엑스 인수(2조5000억원), DL케미칼의 크레이튼 인수(1조7600억원), 하이브의 이타카홀딩스 인수(1조1200억원) 등 아웃바운드 M&A가 지난해 잇따라 단행됐다. LG전자의 ZKW 인수, CJ제일제당의 슈완스컴퍼니 인수 등 국내 기업의 해외 대형 M&A가 본격화한 2018년 이후 5년 중 올해 연간 아웃바운드 M&A는 최저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경기가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연초 대비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외화 자금으로 인수대금을 납부해야 하는 해외 M&A 특성상 환율 상승은 고스란히 인수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현지에서 달러 등 현지 통화로 빚을 지며 인수대금을 납부한 기업도 치솟는 환율로 예상 대비 큰 조달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 진출이 본격화한 2018년 4월 1054원을 기록한 원·달러 환율은 2021년 1200원 내외에서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올 들어 연초 1191원 수준이던 환율이 1400원대 중반까지 20% 안팎 급등한 전례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됐다. 연말 1500원 돌파를 기정사실로 놓고 내년도 사업 계획을 세우는 기업도 다수다.

기업들은 환율 급등에 연초부터 검토해 왔거나 진행 중인 거래를 재검토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2018년 슈완스컴퍼니에 이어 미국에서 조단위 M&A를 추진했지만 환율 상승으로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LG전자와 카카오도 수천억원에서 조단위 규모 미국 기업 인수를 진행했지만 당분간 현금을 쌓기로 하고 백지화했다. LX그룹도 미국 상장사인 시스템반도체사 매그나칩 인수를 추진했지만 매각 측과의 가격차로 사실상 무산된 상황이다.

인텔의 낸드사업 부문을 90억달러에 인수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까지 70억달러를 1차로 납부했는데, 대금 납입이 미뤄졌다면 환율 급등으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더 내야 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분위기다.

M&A 과정에서 사모펀드(PEF) 등 재무적투자자(FI)와 함께 진행하던 대형 해외 거래도 자취를 감췄다. PEF들이 인수금융을 활용하거나 프로젝트펀드를 조성해 인수대금을 마련해야 하지만 급등하는 환율에 출자자들이 부담을 느끼며 자금 모집이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SD바이오센서의 메리디안 인수는 PEF인 SJL파트너스가 일부 인수대금을 대기로 했지만 자금 모집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다. SK하이닉스도 올초 일부 PEF와 금융회사 등 FI로부터 인수대금 일부를 추가로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외화 자산을 보유한 해외 기업과 글로벌 PEF들은 환율에 힘입어 국내 기업을 더 싸게 인수할 환경이 조성됐다는 관전평이 나온다. 롯데케미칼이 2조7000억원에 인수한 일진머티리얼즈 M&A 때도 글로벌 화학사와 글로벌 PEF가 뛰어들어 경합한 것으로 전해졌다. 몸값 4조원에 이르는 메디트 거래에서도 글로벌 PEF가 인수전을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PEF인 베어링PEA는 지난 6월 PI첨단소재 지분 54%를 1조275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지만 인수 시점 대비 주가가 반토막 나며 완주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우려가 나왔었다. 하지만 환율이 당시 1200원 후반대에서 1429원까지 상승하며 인수 부담이 일부 덜어진 만큼 절차를 강행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