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한 '아스테카' 문명…사람을 제물로 바친 까닭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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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멕시코·유럽 11개 박물관 유물 208점 출품
최신 발굴 성과도 공개…"왜곡·과장되지 않은 본모습 볼 기회"
기하학적 무늬와 그림이 마치 중국 고대 청동기처럼 빽빽하게 새겨진 돌접시 '쿠아우시칼리'는 아스테카 문명 유물이다.
지름 16㎝, 높이 6.5㎝인 이 그릇은 심장을 담는 데 썼다고 한다.
마야, 잉카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3대 문명으로 꼽히는 아스테카 문명에서 가장 신성한 제물은 인간 심장이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심지어 '신들의 배설물'이라고 불린 금으로 심장 모양 장식을 만들기도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인신공양)는 멕시코에서 융성한 아스테카 문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풍습이다.
그들이 인간 심장과 피를 제단에 올렸다는 사실은 다양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잔혹한 의식을 치른 명확한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강력한 권위를 지녔던 아스테카 문명의 참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을 3일 특별전시실에서 개막한다.
앞서 2009년 잉카, 2012년 마야 전시를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멕시코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대규모 아스테카 특별전을 마련했다.
도시국가 40여 곳에서 수백만 명이 살았던 아스테카는 공교롭게도 거의 500년 전인 1521년 8월 중심 도시 테노츠티틀란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는 병사 500명, 선원 100명, 짐꾼과 말 16마리와 함께 진격했다고 전한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일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 "인신공양과 활발한 정복전쟁에서 비롯된 잔혹한 이미지, 스페인 정복자를 신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와 달리 아스테카 문명의 예술과 지식은 매우 발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멕시코에서 이뤄진 최신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정복자가 왜곡하고 과장하기 이전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아스테카 문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소하기에 쉬운 전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도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테카 문서를 없애고 자신들의 시선으로 아스테카를 기록했으며, 신전을 파괴한 뒤 성당을 지었다"며 "멕시코 문화의 원류라고 하는 아스테카 문명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는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템플마요르박물관과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등 유럽 박물관 9곳이 소장한 아스테카 관련 유물 208점을 선보인다.
그중에는 멕시코에서조차 공개되지 않은 출토품도 있다.
전시는 관람객이 아스테카 문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꾸몄다.
아스테카 역사와 신화 등에 관한 해설문을 많이 배치하고, 유물도 자세히 설명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쓴 글 28편을 담은 도록도 발간했다.
5부로 구성된 전시의 시작은 아스테카 최고 조각품으로 알려진 거대한 '태양의 돌' 재현품에 투사되는 영상이다.
약 8분간 이어지는 영상을 통해 아스테카 사람들의 독특하고 복잡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이어 아스테카 지리와 자연환경, 관습, 음식 등을 소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에게 신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자연을 신성시한 아스테카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수많은 신을 모셨다.
아스테카 사람들이 중시한 또 다른 요소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 신전을 불태우고 자신들이 모시는 신상을 가져왔다.
또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공물을 요구했는데, 공물은 번영의 원동력이 됐다.
이 과정에서 아스테카 사람들은 사람을 처형하고 제물로 바쳤다.
다만 희생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군사 활동'과 '정의 구현' 등 통치와 지배 수단으로 인신공희를 활용했다고 한다.
전시는 멕시코시티에 있던 테노츠티틀란 발전상도 다룬다.
테노츠티틀란은 15∼16세기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고 하는데, 곳곳을 장식했던 건축 장식 등을 볼 수 있다.
테노츠티틀란의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 일대 발굴 성과도 조명한다.
특히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조각상은 기괴한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갈비뼈 아래로 간과 쓸개가 튀어나와 있고, 머리에는 가발을 붙일 때 썼던 구멍이 남아 있다.
높이 176㎝, 무게 128㎏이다.
발견 당시 수백 개 조각으로 부서져 있어서 출토와 복원에 1년 6개월 가까이 걸렸다.
정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아스테카 문명의 문화적 맥락을 두루 살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며 "지금도 멕시코시티에서는 발굴이 이뤄지고 있고, 아스테카 연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최신 발굴 성과도 공개…"왜곡·과장되지 않은 본모습 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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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잉카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3대 문명으로 꼽히는 아스테카 문명에서 가장 신성한 제물은 인간 심장이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심지어 '신들의 배설물'이라고 불린 금으로 심장 모양 장식을 만들기도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인신공양)는 멕시코에서 융성한 아스테카 문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풍습이다.
그들이 인간 심장과 피를 제단에 올렸다는 사실은 다양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잔혹한 의식을 치른 명확한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강력한 권위를 지녔던 아스테카 문명의 참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을 3일 특별전시실에서 개막한다.
앞서 2009년 잉카, 2012년 마야 전시를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멕시코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대규모 아스테카 특별전을 마련했다.
도시국가 40여 곳에서 수백만 명이 살았던 아스테카는 공교롭게도 거의 500년 전인 1521년 8월 중심 도시 테노츠티틀란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는 병사 500명, 선원 100명, 짐꾼과 말 16마리와 함께 진격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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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도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테카 문서를 없애고 자신들의 시선으로 아스테카를 기록했으며, 신전을 파괴한 뒤 성당을 지었다"며 "멕시코 문화의 원류라고 하는 아스테카 문명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는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템플마요르박물관과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등 유럽 박물관 9곳이 소장한 아스테카 관련 유물 208점을 선보인다.
그중에는 멕시코에서조차 공개되지 않은 출토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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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카 역사와 신화 등에 관한 해설문을 많이 배치하고, 유물도 자세히 설명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쓴 글 28편을 담은 도록도 발간했다.
5부로 구성된 전시의 시작은 아스테카 최고 조각품으로 알려진 거대한 '태양의 돌' 재현품에 투사되는 영상이다.
약 8분간 이어지는 영상을 통해 아스테카 사람들의 독특하고 복잡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이어 아스테카 지리와 자연환경, 관습, 음식 등을 소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에게 신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자연을 신성시한 아스테카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수많은 신을 모셨다.
아스테카 사람들이 중시한 또 다른 요소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 신전을 불태우고 자신들이 모시는 신상을 가져왔다.
또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공물을 요구했는데, 공물은 번영의 원동력이 됐다.
이 과정에서 아스테카 사람들은 사람을 처형하고 제물로 바쳤다.
다만 희생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군사 활동'과 '정의 구현' 등 통치와 지배 수단으로 인신공희를 활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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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노츠티틀란은 15∼16세기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고 하는데, 곳곳을 장식했던 건축 장식 등을 볼 수 있다.
테노츠티틀란의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 일대 발굴 성과도 조명한다.
특히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조각상은 기괴한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갈비뼈 아래로 간과 쓸개가 튀어나와 있고, 머리에는 가발을 붙일 때 썼던 구멍이 남아 있다.
높이 176㎝, 무게 128㎏이다.
발견 당시 수백 개 조각으로 부서져 있어서 출토와 복원에 1년 6개월 가까이 걸렸다.
정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아스테카 문명의 문화적 맥락을 두루 살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며 "지금도 멕시코시티에서는 발굴이 이뤄지고 있고, 아스테카 연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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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