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감시 소홀 속에 90년대부터 판매…수차례 조사에도 실체 확인 역부족
옥시 등 제조업체 관계자 대부분 유죄…SK·애경 등 관계자는 여전히 재판 중
[환경탐구생활] ⑭ 12년째 진행중인 참사…'공기 살인자' 가습기살균제
2011년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 '공기 살인자'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세상에 드러난 지 올해로 12년째를 맞았다.

1천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천명의 피해자를 낳은 이 사태는 여러차례 진상 조사와 조정 과정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눈물 속에서 이 기나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90년대 시작…소리 없이 확산한 참사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2011년 급성호흡부전 환자들이 잇따라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환자들은 대부분 영유아나 임산부, 혹은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 등으로, 원인불명의 폐 손상을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건당국은 역학조사를 한 결과 환자들이 가습기살균제를 자주 사용한 것을 발견했고, 흡입독성 실험을 통해 가습기살균제가 환자들에게서 발생한 폐 섬유화의 원인임을 밝혀냈다.

1994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살균제는 유공(SK케미칼의 전신)을 비롯해 옥시와 애경산업 등 생활용품 기업들이 잇달아 제품을 내놓고, 대형 할인마트들도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시장이 커졌다.

가장 많이 판매된 옥시의 제품들은 PHMG, PGH 등 살균 성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화장품이나 물휴지 등 피부와 접촉하는 제품에 사용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흡입 방식으로 사용하는 살균제에 사용되면서 폐 질환을 야기했다.

가습기살균제 살균 성분은 정부의 유해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흡입독성 평가를 거치지 않으면서 정부의 감시에서 벗어난 채 소비자들에게 팔려나갔고, 무려 20년 가까이 판매돼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중단됐다.

보건당국의 독성실험 후에도 2014년 폐손상조사위원회의 피해자 조사, 2016년 국회 국정조사, 2018년 가습기살균제·세월호 참사 진상조사를 맡은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조사 등 진상 확인을 위한 조사가 여러 차례 진행됐으나 정부 등 관계기관에 대한 조사가 미흡해 실체 확인에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검찰은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업체들에 대한 수사에 나서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신현우 전 옥시 대표 등을 기소했고, 신 전 대표가 징역 6년에 처해지는 등 대부분 관계자의 유죄가 확정됐다.

PHMG, PGH가 아닌 살균 성분인 CMIT·MIT를 사용한 제품들은 인체 위해성에 대한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책임 선상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CMIT·MIT의 유해성에 대한 역학조사 자료가 쌓이고 환경부가 2018년말 관련 연구자료 전반을 모아 검찰에 자료로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검찰은 CMIT·MIT를 사용한 '가습기 메이트'의 제조·판매업체인 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과 애경산업을 재조사해 관계자 1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했으나 지난해 초 전원 무죄로 1심이 끝나 항소심 중이다.

박철 전 SK케미칼 부사장과 SK케미칼, SK이노베이션의 가습기살균제 관련 증거인멸 및 은닉 혐의 재판은 현재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환경탐구생활] ⑭ 12년째 진행중인 참사…'공기 살인자' 가습기살균제
◇ 뒤늦은 피해구제, 끝나지 않는 합의…여전한 피해자·유족 고통
처음 수십 명으로 시작됐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규모는 조사를 거듭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살아남은 이들도 폐 섬유화뿐만 아니라 폐렴, 천식 등 각종 폐 질환을 앓으며 일부는 호흡기를 낀 채로 살고 있고,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각종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2011년 사태가 불거진 후에도 법적 근거 미비와 부처 간 업무 영역 등을 이유로 대처에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2014년 3월에야 처음으로 공식 피해 판정을 내리고 피해 구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국회는 5년여가 지난 2017년이 돼서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지원 방안 등을 담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등 한참 더 늦었다.

특별법은 피해자들에게 요양급여와 구제급여를 지급하고, 구제급여 대상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피해자를 위해 특별구제계정을 설치해 운영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특별구제계정의 재원은 가습기살균제 사업자와 원료물질 사업자의 분담금 1천억원으로 충당하기로 했으며, 건강피해 인정을 전문적으로 검토할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렇게 국가에서 본격적으로 피해 구제에 나서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기업을 대상으로 각자 조정에 나서거나 민사 소송 등을 진행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가 인과관계가 있다며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옥시의 경우 공개 배상안을 마련하고 특별구제계정 분담금으로 674억원, 인도적 기금으로 50억원을 제공하는 등 총 3천640억원 이상을 부담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이 다양한 건강피해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환경부는 202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기존 질환별 건강피해 인정기준은 폐지하고, 장관이 고시하는 기준에 따라 개인별 의무기록을 종합검토하는 개별심사를 중심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여부를 판정하고 있다.

심사 완료까지는 2년 정도 소요될 전망으로, 2022년 2월 기준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총 4천291명으로 늘었다.

아울러 지난해 10월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들과 제조·유통 기업들 사이에서 조정을 진행할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민간 조정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정위는 지난달 피해자별 최대 5억여원, 총 7천억원에서 9천억여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피해조정안을 마련했으나 60% 이상의 보상금을 책임져야 하는 옥시와 애경 등이 부동의 의사를 밝히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피해자들은 옥시와 애경이 조정안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기업들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1기 조정위 활동은 이달 말로 마무리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