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가 약정 상당 부분 이행…계약 무효로 만들 수는 없어"
단계적·계속적 업무 수행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이 상당 부분 이행된 상황에서 사정이 바뀌었다는 사유로 계약 말소를 할 땐 이미 이행된 부분까지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A씨와 B씨가 해외 이주 알선업체 C사를 상대로 낸 수수료 반환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5일 밝혔다.

A씨와 B씨는 2011년 미국 비숙련 취업 이민을 위해 C사와 알선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5년 미국 노동부가 노동허가신청을 거절하자 노동허가를 다시 신청하기로 하고 국외 수수료 금액을 변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비숙련 취업 이민은 ▲ 미국 노동부의 노동허가 단계 ▲ 미국 이민국의 이민허가 단계 ▲ 주한미국대사관의 이민비자 발급 단계로 구분되므로 알선 수수료도 단계별로 지급하기로 했다.

계약 때 8천달러를 낸 뒤 노동허가가 나오면 5천달러를 추가로 납부하고 이민허가까지 나오면 5천달러를 더 내는 식이다.

실제로 계약이 이행되면서 A씨와 B씨는 노동허가와 이민허가를 받게 됐다.

그런데 미국 당국은 2016년 A씨에 대해, 2017년에는 B씨에 대해 비자 발급 전 추가 심사를 한다는 내용의 '행정검토' 결정을 한다.

때문에 순조로울 줄 알았던 이민 절차는 2019년 하반기까지 진척이 없게 됐다.

이에 A씨와 B씨는 사정 변경으로 인한 계약 해제를 주장하며 C사에 수수료 90%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의 쟁점은 양측의 계약이 해제(解除)된 것으로 볼 것인지 해지(解止)로 볼 것인지였다.

해제가 되면 계약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되고 계약을 해제한 사람은 원상회복의 의무를 갖게 된다.

해지는 원래 계약은 그대로 둔 채 해지 시점부터 효력을 말소한다.

1심과 2심은 C사의 책임으로 계약이 해제됐다는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C사가 수수료 중 90%인 약 1천800만원씩을 A씨와 B씨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2심의 계산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계약은 해제가 아니라 해지하는 것이 옳다는 취지다.

계약은 '일시적 계약'과 '계속적 계약'으로 나뉜다.

매매·증여·차용 등 보통의 '일시적 계약'은 해지할 수는 없고 해제만 할 수 있는 반면, 임대차나 고용처럼 시간적 계속성을 갖고 이행되는 '계속적 계약'은 해제와 해지 모두 가능하다.

1심과 2심은 이번 계약을 '일시적 계약'으로 보고 계약이 해제됐으니 C사가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반면 대법원은 "C사는 상당히 장기간 지속되는 취업 이민 절차가 단계적으로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알선·수속 등 업무를 계속해서 충실하게 수행할 의무가 있다"며 "이 사건 계약은 계속적 계약"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계속적 계약이므로 해제와 해지가 모두 가능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당초 계약이 정한 업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이행된 상태에서 원고들이 '사정 변경'을 이유로 계약 효력을 소멸시키려 하고 있으므로 해지만을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해지가 되면 해지 전까지의 계약은 유효한 것이 되므로 정산 범위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취지"라며 "파기환송심에서는 정산 금액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