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슬리피가 28일 서울 남산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범준기자
래퍼 슬리피가 28일 서울 남산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범준기자
“24평 아파트 대신 샀지 람보르기니를…. 6억짜리 차를 난 사버렸어.”(래퍼 염따의 ‘염BORGHINI’)

“내 옛날 작업실엔 쥐가 나오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G바겐을 타.”(래퍼 디아크의 ‘Cold’)

래퍼들의 자동차 자랑은 힙합의 단골 메뉴다. 그들 사이에선 고급차가 성공을 인증하는 트로피로 통한다. 이런 가운데 럭셔리카를 제쳐두고 낡은 올드카에 푹 빠진 연예인이 있다. 이들은 수명이 다해 주행할 수도 없는 차를 복원해 도로 위를 달린다. 벗겨진 가죽 시트를 교체하고, 낡은 인테리어를 매만져 새것처럼 만든다. 순정 부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손에 기름때를 묻히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올드카에는 향수가 있다

사진=김영우·김범준 기자
사진=김영우·김범준 기자
“한국 올드카를 리스펙하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갖고 있는 차니까요.” 신곡 ‘그랜저’를 최근 발매한 래퍼 슬리피는 올해 초 구입한 1992년식 흰색 ‘각 그랜저’를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한 대에 수억원이 넘는 럭셔리카 롤스로이스를 줘도 각 그랜저와 바꾸지 않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다.

189㎝의 장신에 양팔에는 타투가 가득한 그는 각 그랜저가 상징하는 ‘성공’이라는 키워드에 꽂혀 있었다. 슬리피는 “예전 현대자동차 광고에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랜저로 답했다’는 카피가 등장한 적이 있다”며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걱정해 준 친구와 팬에게 ‘괜찮아졌다’고 대답할 방법을 찾다 각 그랜저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각 그랜저를 구입한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부품을 구했다. 은색 크롬 장식과 ‘Hyundai’ 영문 로고가 들어간 휠캡은 일본 중고 사이트에서 샀다. 올드카 동호회 지인을 통해 폐차장에서 부품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올드카에는 세대를 아우르는 향수가 있다”고 했다.

흰색 포르쉐 986 모델을 운전하기도 했던 슬리피는 올드카에서 오는 ‘하차감’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비싼 외제차도 5년 할부 계약하면 탈 수 있다”며 “올드카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슬리피는 “젊은 친구들이 올드카를 운행하면서 과거 오래된 차를 ‘똥차’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던 문화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며 “더 많은 다양한 오래된 차를 한국의 도로에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변치 않는 예술적 가치

슬리피는 닮고 싶은 올드카 마니아가 있다고 했다. 힙합그룹 다이나믹듀오의 래퍼 개코다. 개코는 BMW E30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E30는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출시된 BMW 3시리즈의 2세대 모델을 가리킨다. 내년이면 단종된 지 30년이 되는 모델이다. 개코는 1988년식 E320i 카브리올레를 보유하고 있다.

E30는 국내에서 올드카 입문용 차량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공급 자체가 거의 없어 매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주행거리 15만㎞의 1990년식 컨버터블 모델은 3000만원 중후반대에 가격이 형성돼 있다. 상태가 좋은 S급은 부르는 게 값으로 전해진다. 아예 국내 구매를 포기하고 일본에서 직접 사서 이삿짐으로 들여오는 사람도 있다.

개코는 E30의 매력으로 디자인을 꼽는다. E30는 1976년부터 1990년까지 BMW의 수석디자이너였던 클라우스 루테의 작품이다. 개코는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그란 헤드램프와 좁은 키드니 그릴이 마음에 든다”며 “E30는 과거의 것이지만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예술적인 가치가 느껴진다”고 했다. 개코 외에도 형사 가제트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배한성 씨, 힙합그룹 마이티마우스의 래퍼 쇼리 등이 BMW E30를 보유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차 가격 줘도 안 팔아요”

방송인 배칠수 씨는 연예계에서 소문난 올드카 애호가로 꼽힌다. 집에 차고를 만들어 직접 차량을 수리할 정도로 올드카에 대한 식견이나 애정이 깊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BMW E32 740IL 모델의 경우 복원 작업에만 1년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1993년 출고된 모델을 1000만원대에 구입해 5000만원 이상을 추가로 들여 복원을 마쳤다. 그는 라이트 조작 버튼부터 램프 커버, 그릴까지 세세한 부분마저 독일산 순정 부품을 구해 원형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한다.

배씨는 최근 유튜브를 통해 메르세데스벤츠의 W126 300SEL도 공개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급 세단인 S클래스의 5세대 모델로,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생산된 차량이다. 5세대 모델 중 560SEL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탔던 차로도 유명하다. 배씨는 “이런 올드카는 지금 생산되지 않는 차”라며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차라는 게 중요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김진원/박상용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