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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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권에서 개헌은 약방의 감초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9차 개헌 이후 지난 34년 간 잊힐만 하면 등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공론화 과정 없이 연기만 피워놓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9차 개헌 뒤 불과 3년 뒤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YS) 민주당 총재,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3당 합당에 합의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기로 약속하고 비밀 각서를 썼다. 하지만 김영삼 총재는 각서가 공개되자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대표 업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대통령 출마 뜻이 강했던 그는 각서가 공개된데 대한 항의의 뜻이었다. 결국 내각제 개헌 약속은 9개월 만에 없던 것이 됐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JP가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고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1999년까지 개헌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DJP연합은 깨졌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원 포인트 개헌’ 제안,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집권 시 개헌 약속 등이 이어졌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김형오 국회의장 시절 등 국회 차원에서도 여러차례 개헌을 추진했으나 흐지부지 됐다.

개헌이 매번 도루묵이 된데는 각 정파 간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 미래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유불리 계산이 앞섰다는 얘기다. 현직 대통령은 정국 타개용을 제시하기 일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 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6년 개헌 제안 등이다.

대선 후보들이 개헌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개헌론이 자칫 국정 블랙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개헌의 핵심인 권력구조 개편을 놓고 여야 간뿐만 아니라 같은 당 내에서도 대선 주자간 입장이 다르기 일쑤였다. 개헌을 위해선 국회의원 3분의 2(200명) 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 구조 개편 등 개헌 내용에 일치하는 세력들이 의원 3분의 2를 확보하기 매우 어려워 개헌은 매번 공수표가 되곤 했다.

권력구조 개편으로는 내각제와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대통령 중임제 도입 등이 있다. 문재인 정권에선 중임제를 선호하고 있다. 청와대가 2018년 3월 내놓은 개헌안에는 ‘대통령 임기 4년제 및 1회 중임 허용’, 대선과 지방선거 동시 실시 조항이 들어 있다. 민주당도 비슷한 내용으로 개헌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표를 맡기 전 대통령 중임제와 책임총리제를 주장한 바 있다.

박병석 국회의장도 개헌에 적극적이다. 박 의장은 지난달 21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국민 통합과 대전환 시대에 맞는 새 헌법이 필요하다”며 “여야 정치 지도자들과 각 정당은 개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의 평가를 받기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또 개헌을 통한 권력 분산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여당 대선주자들 중 이낙연 전 대표와 정세균 전 총리는 개헌에 적극적이다. 정 전 총리는 4년 중임제와 분권형 개헌안을 내년 대선 때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분권형은 대통령은 외교·안보·국방 등 외치를 담당하고, 내치는 총리가 맡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권 개헌안의 또 다른 초점은 이념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조항이다. 청와대의 개헌안 전문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부마항쟁’, ‘6·10항쟁’이 들어갔다. 여당 일부 의원들은 ‘촛불 항쟁’도 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토지공개념과 동일노동 동일임금, 공무원 노동3권 인정, 지방 분권 강화 등도 넣자고 한다.

특히 토지공개념과 관련, 청와대 개헌안 128조 2항에는 “국가는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했다. 하위 법률에 토지 소유에 한도를 두거나 매매 제한, 개발 이익 환수 등을 담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도 토지공개념을 개헌에 넣자고 주장하며, 구체적 실현 방안으로 택지소유상한법과 개발이익환수법, 종합부동산세법 등 ‘토지공개념 3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정부 잘못으로 빚어진 집값 폭등을 반시장적 정책으로 풀려고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는 의원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개헌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건드리는 권력구조 개편 이외에 여당의 이념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헌안에 대해선 반대하고 있다. 과거 국민발안제 개헌에 동참했던 한 국민의힘 의원은 “1987년 개헌 이후 시대가 많이 변했고,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 폐해가 드러난 만큼 이런 부분을 손 대야지 여당이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선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재적 의원 3분의 2가 필요한데, 국민의힘(103석)이 반대하면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금은 개헌보다 방역과 민생에 주력할 때”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당이 추진하는 개헌은 또 ‘약방의 감초’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개헌이 매번 '약방의 감초' 된 까닭 [여기는 논설실]
홍영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