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2월 14일은 일제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날
관리 여건 탓 2번이나 이전…우여곡절 끝 2011년 터 잡아

[※ 편집자 주 : '에따블라디'(Это Влади/Это 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블라디(블라디보스토크)'라는 뜻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특파원이 러시아 극동의 자연과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

"기념비와 관련한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자주 찾아요.

"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사형선고일(1910년 2월 14일)을 앞둔 지난 7일 낮.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시(市)에서 차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크라스키노(옛 연추) 지역 외곽에 우뚝 서 있는 단지동맹비가 외로이 기자를 맞이했다.

[에따블라디] 한국인 발길끊겨 쓸쓸한 안중근 단지동맹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탓이었을까.

홀로 선 기념비가 왠지 모르게 더욱 쓸쓸해 보였다.

거대한 들판에 세워진 3∼4m 높이의 비석 주변에는 녹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단지동맹비는 높이와 폭이 1m 정도인 작은 비석 등 2개의 검은색 비석으로 이루어졌다.

작은 비석에는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03년 3월 5일 안중근 의사와 11인의 동지는 크라스키노 지역에 모여 왼손 무명지(넷째 손가락)를 잘랐다.

조국 독립과 일제 타도의 뜻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안 의사는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 최초의 의병부대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에따블라디] 한국인 발길끊겨 쓸쓸한 안중근 단지동맹비
이를 기리고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핏방울 형상의 기념비를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에 세웠다.

하지만 강변에 설치하다 보니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고, 기념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현지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후 현지에서 영농사업을 하는 한국기업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가 2006년 관리가 쉬운 농장 앞 공터로 비석을 옮겼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새롭게 옮긴 장소가 국경지대로 편입돼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011년 8월 기념비는 결국 유니베라의 또 다른 농장으로 이전됐다.

지금의 자리에 정착한지 올해로 10년이 된 셈이다.

코로나19로 한국인 관광객이 없어 썰렁하기만 한 이곳에서 기자는 우연히 현지 주민들을 만났다.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다리야(32)는 "여름과 겨울에 아이를 데리고 기념비에 온다"면서 크라스키노에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념비의 역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에따블라디] 한국인 발길끊겨 쓸쓸한 안중근 단지동맹비
다리야의 가족은 한국에서 왔다는 기자가 신기했었는지 자연스레 사진 촬영까지 요청했다.

코로나19로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긴 상황에서 한국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현지인들이 우리 독립운동가에 대해 관심을 두고 기념비까지 찾아줬다는게 고마워서 흔쾌히 촬영에 응했다.

"아이들에게 이곳과 관련한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찾는다"고 말한 뒤 다리야 가족은 자리를 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당시 러시아 관할이었던 하얼빈역에서 일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며 이후 뤼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에따블라디] 한국인 발길끊겨 쓸쓸한 안중근 단지동맹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