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이어진 정묘호란·병자호란
조선, 국제질서의 변화 파악하지 못해 전쟁 발발
"성리학자, 임진왜란 참사 불구 실패 자초" 평가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들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러했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후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고,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병된 조선군을 일부(강홍립 장군의 군대) 포함한 20만명의 병력으로 후금을 공격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3분의 1 정도 병력을 가진 누르하치는 기마병을 활용해 사르후(薩爾滸)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요동을 장악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팽창을 추진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파악하면서 조선의 위치를 이해하고 정책으로 활용한 사람은 광해군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상황 속에서 세자로 책봉된 후에 분조를 이끌면서 위기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서자 출신으로 선조와 서인들의 견제를 받다가 왕이 된 그는 국제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했고,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1609년에 ‘기유약조’를 맺어 대마도에 제한적인 무역허가를 내주는 대신 관리권 안에 둬 배후를 안정시켰다. 더불어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서양세계와 교류하는 일본이 위협 대상에서 빠진 것을 간파했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는 군사적으로 안전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자주적인 ‘중립외교’를 펼쳤고, 실효성을 거두고 있었다.
결국 정책을 변경한 후금은 1627년 1월에 3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같은달 21일에는 청천강을 건넜고, 인조는 25일에 강화도로 도피했다. 큰 전투가 없이 두 달 만인 3월 3일에 양국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형제지맹”을 맺었다. 불평등한 조약이지만 후금이 조선을 전면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음을 반증한 것이다. 정묘호란은 국제질서의 흐름과 적국의 요구를 간파하지 못한 외교적 패착으로 자초한 패전이었다.
명나라에서는 1627년에 산서 지역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고,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홍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포위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적극적인 친명(向明)세력으로 변신한 조선은 필수적인 공격대상이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후에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한명기, 《병자호란 1.2》).
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는 일이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라고 했다. ‘쌍방책임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크게 변질했고, 임진왜란의 처참한 상황 후에도 반성과 책임의 통감, 개혁정치의 구현은 커녕 관직과 토지, 노예소유를 둘러싼 당파싸움이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라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득권에도 치명타를 입힐 후금의 공격에 비현실적이고, 타자의 입장으로 대응했다. 성리학의 ‘명분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파견한 사실을 의리와 모화사상으로 포장해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었다. 문관 중심의 조정은 청나라의 존재와 요구를 무시했고, 더더욱 친명배금정책을 고수했다.
물론 인조가 군제체를 개편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한 것은 사실이다. 약 9만명 정도로 속오군을 편제시키고, 수군도 3만명 정도로 늘려 전선을 600척 정도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전투력이 강하고, 청과 대결할 수 있는 북방군은 크게 손실을 입었고, 속오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현실을 잘 모르는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대참사를 경험하고도, 반성 없이 또 실패를 자초했다. 백성들은 또 한 번 피해를 입었고, 무려 50만~60만명이 포로로 잡혀 겨울날 고향을 떠나 만주로 끌려갔다.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는 기준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역사에 죄를 지으면, 그것이 간신이다. 미래가 매우 불투명한 현재. 훗날 간신으로 기록될 인물들이 되도록 적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