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액체 뿌리는 범죄 빈발…"여성혐오 내재, 성범죄 폭넓게 인정해야"
"강남역의 한 영화관 뒤편 먹자골목에 남자들이 떼로 서 있고, 혼자 지나가는 젊은 여성한테만 알 수 없는 스프레이를 몰래 분사한다고 합니다.

다들 조심하시고 널리 퍼 날라 주세요.

"
지난달 21일 트위터에 올라온 이 짧은 글은 1천여회 가까이 리트윗(재전송)됐고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확산했다.

현장 사진 등 별다른 증거가 첨부되지는 않았지만 여성들은 "정말 여자로 살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며 여성 대상 범죄 가능성을 우려했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이 트윗은 강남역 인근 한 휴대전화 대리점 직원들의 거리 판촉행위가 와전된 결과로 보인다.

트윗이 올라온 날 오후 7시께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젊은 남성 여러 명이 손 소독제를 들고 여성을 대상으로만 호객행위를 한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은 이들이 여성의 손에 소독제를 뿌린 행위에 폭행이나 추행의 고의는 없다고 보고 현장에서 계도 조치했다.

사건 자체는 해프닝 성격이 짙지만 여성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남성이 불특정다수 여성에게 신체 접촉 없이 액체를 뿌려 범죄로 규정된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대학생 A(남)씨가 서울 중랑구 일대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임신부 등 여성들만 골라 침을 뱉고 달아난 혐의(상습폭행)로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경찰에서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9월에는 남성 취업준비생 B씨가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 수변공원 일대에서 길을 가던 여성 6명의 스타킹에 검은색 잉크를 뿌리고 달아났다가 붙잡혀 재물손괴와 폭행 혐의로 입건됐다.

"취업 준비로 받은 스트레스를 여성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풀려고 했다"는 것이 범행 동기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범죄가 여성에 대한 무시와 적대감 등 '여성 혐오' 표출이라고 본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인 장윤미 변호사는 "사적 관계가 있는 여성이 아닌, 여성 일반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는 기본적으로 여성 혐오가 내재했다고 본다"며 "신체적으로 남성과 대적하기 어려운 여성을 깔보며 공격하는 과정에서 쾌감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자신을 사회적 약자나 패배자로 느끼는 일부 남성이 자신보다도 약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을 상대로 반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해자와 직접 접촉이 없어 대수롭지 않은 범죄로 여기고 방치했다가 중범죄로 나아갈 여지를 열어둘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전 서울경찰청 범죄심리분석관)는 "과거 연쇄살인범 정남규도 살인 행각을 시작하기 전 간호사, 백화점 판매원 등 제복을 입은 여성에게 로션이나 라면 국물 등을 몰래 뿌린 뒤 이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즐긴 사례가 있다"며 "초기에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범행이 폭발적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건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더라도 모든 경우 가해자가 성범죄로 처벌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수치심을 줄 목적 등이 인정되지 않으면 단순 폭행사범 취급되기도 한다.

장윤미 변호사는 "정액처럼 확실히 성적 목적이 인정될 수 있는 액체를 몸에 뿌렸다면 비난 가능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해당 행위를 성범죄로 다루기 어려울 수 있다"며 "범행이 상습적으로 벌어졌다면 양형 요소로는 참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성계에서는 성범죄의 범위를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법률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남성이다 보니 법조계와 정치권에서 '이것까지는 성범죄로 볼 수 없지 않겠느냐'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며 "일상적 호객행위로도 충분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여성의 현실이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