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충돌 속 日의 계산…韓 배제 노리나 [여기는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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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1면에 나란히 실린 두 기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하나는 미국 의회가 반도체 국내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250억 달러 규모의 새로운 보조금 투입을 검토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다른 하나는 일본 정부가 새로운 틀의 첨단기술 수출규제를 미국 등에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두 기사는 별개였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의 반도체산업 지원 기사엔 ‘중국의 부상에 대항’ ‘해외생산 의존도에 위기감’이란 부제가 달렸다. 닛케이는 위싱턴 D.C. 발(發) 기사로 미국 의회가 반도체에 거액의 공적 지원을 하는 목적은 중국에 대항해 인텔 등 반도체 기업의 개발력을 높이는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미국이 반도체 생산의 해외 의존을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보장과 군사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경계감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닛케이는 미국의 이런 우려를 통계로도 확인시켜 줬다. 세계 전체 반도체 시장을 놓고 보면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1위로 47% , 2위 한국이 19%, 3위 일본이 10%를 차지한다. 하지만 국내 생산능력으로 보면 미국은 12%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엔비디아, 퀄컴 등 반도체회로 설계에 특화된 팹리스(공장 없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산을 대만 등 해외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문제는 군사기술에 직결되는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이 공동화(空洞化)된다고 가정할 때 일어난다. 공급 루트의 불안이 발생하면 곧 안전보장의 리스크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한국이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에 나온다. 중국이 2025년 반도체의 75%를 국내에서 생산할 목표를 내걸고 있다며 하이테크 분야가 미·중의 주전장(主戰場)이 됐다고 진단한 닛케이는, 중국과 달리 시장주의 경제 미국이 특정산업 지원을 들고 나온 점에 눈길을 돌렸다. 미국은 과거 첨단기술 연구개발에 공적 예산을 지원해왔지만, 공장 건설 등에 보조금을 직접 투입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란 것이다. 뒤이어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구상이 대만의 TSMC 등 해외기업이 미국에서 생산하는 경우도 지원대상에 넣고, 일본·유럽 등 동맹국들과 함께 최신 반도체를 개발하는 공동기금을 창설하는 방안도 포함하고 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다음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등 첨단기술이 군사적으로 전용(轉用)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의 새로운 틀을 미국, 독일 등에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닛케이 기사다. 민간기술을 이용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해, 동맹국 끼리 긴밀히 연대해 수출을 제한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다. 미국이 지금 중국 화웨이를 대상으로 수출규제를 독자적으로 하고 있는데, 동맹국들도 함께 보조를 맞추자는 얘기다.
여기서 일본의 제안은 그냥 동맹국 끼리의 보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현재 바세나르 협정 등 몇가지 국제수출관리체제가 있지만 수십개국이 참가하는 등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니 첨단기술을 보유한 국가 끼리 모여 수출을 통제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자는 제안은 일단 그럴듯하게 들린다. 현안이 발생할 때 회원국들이 바로 논의해 단기간에 수출규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일본 정부가 새로운 수출통제체제에 들어올 국가로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을 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규제대상 첨단기술은 1) 인공지능(AI)·기계학습, 2) 양자컴퓨터, 3) 바이오, 4) 극초음속 등 네가지 분야가 중심이다. 이 기술들이 중국으로 유출돼 군사목적으로 전용되면 안전보장이 위협받는다는 이유에서다.
닛케이의 두 기사는 공통점이 있다. 겨냥하는 타깃이 중국이란 점, 미·일 등을 중심으로 기술동맹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글로벌 공급망(GVC)이 조정되면서 지역 중심 공급망(RVC)이 부상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지만 물밑에서는 미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중국을 겨냥한 ‘기술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과 일본의 동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민감한 연구 도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중국 대학원생, 연구자 등 1000여명의 비자를 취소하자, 일본은 화답이라도 하듯이 동조하고 나섰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첨단기술의 중국 유출을 막을 목적으로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의 비자 발급시 ‘경제 안전보장 강화’ 관점에서 심사를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내놨다. “미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중국 유학생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중국으로 기술이 유출되는 일이 발생하면) 미국 대학, 연구기관 등과 공동연구가 어려울 것이다” 등 일본 내에서 나오는 우려는 이번 조치가 중국을 겨냥한 것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중국 내부에서 “미국을 따라하느냐” “미·일 해양동맹이냐” 등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피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미·중 충돌 속에서 빠른 시일 내 기술획득이 더욱 절박해진 중국 입장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과의 관계를 관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어쩌면 일본은 이런 중국의 속내를 읽으며 몸값을 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입장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이 보이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미국과 중국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닐 가능성이다. 미·중 충돌 속에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기술동맹으로 확대하면서 한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일본 정부가 새로운 첨단기술 수출규제의 틀을 제안하겠다는 국가군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이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동맹국들과 함께 최신 반도체를 개발하는 공동기금을 창설하더라도 일본이 한국의 참여를 꺼려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가지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첨단기술 수출규제 조치를 하고 있고 여기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동참함에 따라,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등을 겨냥한 수출규제 조치 역시 자연스럽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자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판결 때문임이 분명하지만, 일본이 표면상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기에 대한 캐치올 통제 미흡 등 ‘안보’ 우려였다. 이런 표면상 이유가 미·중 충돌이 격화하면서 언제든 실질적인 이유로 바뀔 수 있게 됐다. 한국이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경로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수출규제 조치로 한국을 괴롭힐지 모른다. 그것도 중국에 대해 첨단기술 수출규제 조치를 하고 있는 미국의 묵인 아래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가운데 지난 7월 분쟁해결기구(DSB)에서 미국이 했다는 발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 때 미국은 “일본만이 자국의 본질적인 안보에 필요한 조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안보 조치는 WTO 심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국이 오랜 입장을 반복한 것으로 일본을 지지한 것은 아니란 해석을 내놨지만, 과연 그럴까? 미·중 충돌 상황에서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중국에 취하고 있는 수출규제 조치와 연계하면 그렇게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미국의 린치핀, 한국에 대한 중국의 접근법’이란 미국 Brookings 보고서는 한·중 간 학생 교류에 주목했다. 2018년 기준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중국 학생수 6만8000명,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한국 학생수 6만3000명,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미국 학생수 2700명,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한국 학생수 5만8000명에 달한다는 통계였다. 미국이 미국 밖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기술유출을 문제 삼는다면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요주의 대상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미·일 중심의 블록 간 대치 상황이 전개되면 한국 산업구조의 취약점인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에도 치명타가 될 공산이 크다. 소·부·장 산업을 키우려면 국산화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미·중 충돌이 격화되면 중국시장을 발판으로 한 도약은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다. 미국시장으로 눈을 돌려도 쉽지 않다. 한국을 미국 중심 기술동맹에서 배제하려는 일본의 집요한 공격과 방해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른바 ‘쿼드(Quad)’로 불리는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외교장관 회담이 한국에 던지는 소외감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국을 쿼드에 참여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일본도 그런지는 의문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 주최 화상 세미나에서 쿼드에 대해 “다른 나라들의 국익을 배제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이란 게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지 묻고 싶지만, 쿼드는 이미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실이 됐다. 한국이 자꾸 일본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불길한 상상이 밀려온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
먼저, 미국의 반도체산업 지원 기사엔 ‘중국의 부상에 대항’ ‘해외생산 의존도에 위기감’이란 부제가 달렸다. 닛케이는 위싱턴 D.C. 발(發) 기사로 미국 의회가 반도체에 거액의 공적 지원을 하는 목적은 중국에 대항해 인텔 등 반도체 기업의 개발력을 높이는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미국이 반도체 생산의 해외 의존을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보장과 군사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경계감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닛케이는 미국의 이런 우려를 통계로도 확인시켜 줬다. 세계 전체 반도체 시장을 놓고 보면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1위로 47% , 2위 한국이 19%, 3위 일본이 10%를 차지한다. 하지만 국내 생산능력으로 보면 미국은 12%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엔비디아, 퀄컴 등 반도체회로 설계에 특화된 팹리스(공장 없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산을 대만 등 해외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문제는 군사기술에 직결되는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이 공동화(空洞化)된다고 가정할 때 일어난다. 공급 루트의 불안이 발생하면 곧 안전보장의 리스크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한국이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에 나온다. 중국이 2025년 반도체의 75%를 국내에서 생산할 목표를 내걸고 있다며 하이테크 분야가 미·중의 주전장(主戰場)이 됐다고 진단한 닛케이는, 중국과 달리 시장주의 경제 미국이 특정산업 지원을 들고 나온 점에 눈길을 돌렸다. 미국은 과거 첨단기술 연구개발에 공적 예산을 지원해왔지만, 공장 건설 등에 보조금을 직접 투입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란 것이다. 뒤이어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구상이 대만의 TSMC 등 해외기업이 미국에서 생산하는 경우도 지원대상에 넣고, 일본·유럽 등 동맹국들과 함께 최신 반도체를 개발하는 공동기금을 창설하는 방안도 포함하고 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다음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등 첨단기술이 군사적으로 전용(轉用)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의 새로운 틀을 미국, 독일 등에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닛케이 기사다. 민간기술을 이용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해, 동맹국 끼리 긴밀히 연대해 수출을 제한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다. 미국이 지금 중국 화웨이를 대상으로 수출규제를 독자적으로 하고 있는데, 동맹국들도 함께 보조를 맞추자는 얘기다.
여기서 일본의 제안은 그냥 동맹국 끼리의 보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현재 바세나르 협정 등 몇가지 국제수출관리체제가 있지만 수십개국이 참가하는 등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니 첨단기술을 보유한 국가 끼리 모여 수출을 통제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자는 제안은 일단 그럴듯하게 들린다. 현안이 발생할 때 회원국들이 바로 논의해 단기간에 수출규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일본 정부가 새로운 수출통제체제에 들어올 국가로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을 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규제대상 첨단기술은 1) 인공지능(AI)·기계학습, 2) 양자컴퓨터, 3) 바이오, 4) 극초음속 등 네가지 분야가 중심이다. 이 기술들이 중국으로 유출돼 군사목적으로 전용되면 안전보장이 위협받는다는 이유에서다.
닛케이의 두 기사는 공통점이 있다. 겨냥하는 타깃이 중국이란 점, 미·일 등을 중심으로 기술동맹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글로벌 공급망(GVC)이 조정되면서 지역 중심 공급망(RVC)이 부상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지만 물밑에서는 미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중국을 겨냥한 ‘기술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과 일본의 동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민감한 연구 도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중국 대학원생, 연구자 등 1000여명의 비자를 취소하자, 일본은 화답이라도 하듯이 동조하고 나섰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첨단기술의 중국 유출을 막을 목적으로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의 비자 발급시 ‘경제 안전보장 강화’ 관점에서 심사를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내놨다. “미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중국 유학생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중국으로 기술이 유출되는 일이 발생하면) 미국 대학, 연구기관 등과 공동연구가 어려울 것이다” 등 일본 내에서 나오는 우려는 이번 조치가 중국을 겨냥한 것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중국 내부에서 “미국을 따라하느냐” “미·일 해양동맹이냐” 등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피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미·중 충돌 속에서 빠른 시일 내 기술획득이 더욱 절박해진 중국 입장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과의 관계를 관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어쩌면 일본은 이런 중국의 속내를 읽으며 몸값을 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입장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이 보이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미국과 중국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닐 가능성이다. 미·중 충돌 속에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기술동맹으로 확대하면서 한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일본 정부가 새로운 첨단기술 수출규제의 틀을 제안하겠다는 국가군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이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동맹국들과 함께 최신 반도체를 개발하는 공동기금을 창설하더라도 일본이 한국의 참여를 꺼려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가지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첨단기술 수출규제 조치를 하고 있고 여기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동참함에 따라,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등을 겨냥한 수출규제 조치 역시 자연스럽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자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판결 때문임이 분명하지만, 일본이 표면상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기에 대한 캐치올 통제 미흡 등 ‘안보’ 우려였다. 이런 표면상 이유가 미·중 충돌이 격화하면서 언제든 실질적인 이유로 바뀔 수 있게 됐다. 한국이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경로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수출규제 조치로 한국을 괴롭힐지 모른다. 그것도 중국에 대해 첨단기술 수출규제 조치를 하고 있는 미국의 묵인 아래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가운데 지난 7월 분쟁해결기구(DSB)에서 미국이 했다는 발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 때 미국은 “일본만이 자국의 본질적인 안보에 필요한 조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안보 조치는 WTO 심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국이 오랜 입장을 반복한 것으로 일본을 지지한 것은 아니란 해석을 내놨지만, 과연 그럴까? 미·중 충돌 상황에서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중국에 취하고 있는 수출규제 조치와 연계하면 그렇게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미국의 린치핀, 한국에 대한 중국의 접근법’이란 미국 Brookings 보고서는 한·중 간 학생 교류에 주목했다. 2018년 기준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중국 학생수 6만8000명,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한국 학생수 6만3000명,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미국 학생수 2700명,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한국 학생수 5만8000명에 달한다는 통계였다. 미국이 미국 밖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기술유출을 문제 삼는다면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요주의 대상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미·일 중심의 블록 간 대치 상황이 전개되면 한국 산업구조의 취약점인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에도 치명타가 될 공산이 크다. 소·부·장 산업을 키우려면 국산화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미·중 충돌이 격화되면 중국시장을 발판으로 한 도약은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다. 미국시장으로 눈을 돌려도 쉽지 않다. 한국을 미국 중심 기술동맹에서 배제하려는 일본의 집요한 공격과 방해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른바 ‘쿼드(Quad)’로 불리는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외교장관 회담이 한국에 던지는 소외감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국을 쿼드에 참여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일본도 그런지는 의문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 주최 화상 세미나에서 쿼드에 대해 “다른 나라들의 국익을 배제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이란 게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지 묻고 싶지만, 쿼드는 이미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실이 됐다. 한국이 자꾸 일본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불길한 상상이 밀려온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