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널리티', '커뮤니타스', '사회극' 개념으로 항쟁 살펴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어느덧 40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흘렀다.
김준태 시인은 1980년 5월의 광주 학살극을 "6·25 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이었다"고 통탄했다.
김 시인은 항쟁 직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절통의 시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법정에 출두해서도 "내가 알기로는 헬기 사격은 없었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학살과 항쟁, 해방의 열흘은 민족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됐다.
뼈아픈 상처가 시간의 흐름 속에 아물어가며 사회적 성장과 성숙의 밑거름이 됐다.
40년이라는 시간은 지난하면서도 뜻깊은 민주화의 여정이었다.


강 교수는 휴교령 며칠 후 광주의 비극을 처음 접하고서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번 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부치는 기록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회학과 종교학의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며 시민종교 연구에 매진한 강 교수가 광주항쟁 연구에 의미 있는 전환을 모색하고자 한다.
"광주의 비극 앞에서 밀려들던 격렬한 충격과 분노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책을 쓰기 위해 기존 연구들을 섭렵하다가, 학문적 통과의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쟁쟁한 사회과학자 대부분이 한 번쯤은 진지하게 파고들었던 주제가 바로 광주항쟁임을 새삼 깨닫게 됐다.
"
저자는 세계 사회과학계가 널리 공유해온 개념인 '리미널리티(liminality·경계/전이/잠재적 상황)', '커뮤니타스(communitas·사회적 상호관계)', '사회극'의 관점으로 광주항쟁과 그 이후를 재조명하면서, 항쟁 참여자들이 깊은 연대와 헌신의 공동체를 형성해나가는 과정과 그 내면적 조건들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그리고 민주시민이 잊지 말아야 할 시대적·사회적 함의를 재구축해낸다.
'리미널리티', '커뮤니타스', '사회극'은 사회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3대 개념으로, 그의 반려자인 에디스 터너(2016년 작고)는 1983년 남편이 타계한 뒤에도 이 연구 작업을 깊이 있게 승계했다.
강 교수는 머리말에서 "이번 책은 터너 부부에게 무한한 빚을 지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일어나선 안 되었던 일은 언제고 다시 바라보아도 아프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공 가운데 하나였던 1980년 5월 광주.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과오를 부인하고,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사실들이 엄존하며, 당사자들의 아픔은 끝내 치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해원을 위해서라도 이만큼 도달한 민주세계를 사는 시민이라면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몫들이 있다.
"
저자의 이번 시도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추가하기보다 기존에 실행하지 않은 접근 방법을 사용해 5·18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통찰을 도출해내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항쟁 참여자들의 주관적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그날의 운동 전체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각각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제거해 추상화하면 연극의 기승전결을 발견하게 되고, 다시 그 기승전결의 틀을 통해 사회생활의 구체적·경험적 인지 질서를 개념적 질서로 바꿔낼 수 있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이를 위해 먼저 사회극의 기승전결(위반-위기-교정/치유-재통합/분열) 단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단계를 분석하면서 두 상황의 경계에 머무는 상황으로서 '리미널리티'와 그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사회적 상호관계인 '커뮤니타스'에 주목한다.
이 개념들로 광주항쟁을 재구성해보면, 항쟁 참여자들의 공동체 형성 과정과 그 내면적 조건 및 특징들을 새롭게 포착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그는 "항쟁 과정에서 형성된 리미널리티는 순응적 주체들을 주조함으로서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질서의 리미널리티'가 아니라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촉진하고 새로운 유토피아적 비전을 만들어내는 '변혁의 리미널리티'였다"고 말한다.
광주 커뮤니타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1일까지는 항쟁의 커뮤니타스와 재난의 커뮤니타스 측면이 지배적이었으나 5월 22일부터 27일까지는 항쟁-재난의 커뮤니타스가 유지되는 가운데 '자치의 커뮤니타스'와 '의례-연극의 커뮤니타스'가 전면에 부상했다.
특히 자치 커뮤니타스에서 광주 커뮤니타스의 해방적 성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회극 관점에서 볼 때, 광주 사회극은 1980년 5월을 넘어 20년 이상 장기간 지속했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하는 가운데, 폭도로 몰린 항쟁 주역들이 민주화 영웅으로 부활하고 항쟁의 기억이 민주화한 신체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광주 사회극은 2000년대 초를 전후해 비로소 분열이 아닌 재통합의 방향으로 종결돼갔다.
저자는 "'사회극 이후의 광주항쟁'은 의미 있는 역사적 기능을 계속하고 있다"며 이를 '쐐기 기능'과 '추동 기능'으로 명명한다.
쐐기 기능이 역사의 역진을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면, 추동 기능은 역사의 전진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는다.
다시 말해 광주항쟁은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역사적 쐐기' 중 하나이자 한국 역사의 전진과 진보를 위한 강력한 추동력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다음은 강 교수가 책의 말미에 결론처럼 내놓은 요체이자 당부다.
"광주항쟁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자치공동체, 대동세상에 대한 희망과 영감의 가장 큰 발원지 중 하나이다.
광주항쟁은 그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라는, 부담스런 예언자적 외침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은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라고 지금도 우리 등을 떠밀고 있다.
"
사람의무늬(성균관대 출판부). 468쪽. 2만5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