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내한공연…피아노 리사이틀 리뷰

관객들은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콘서트홀 입장이 허락됐다.

무대에 설치된 피아노 앞에서 한 남자가 이미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빨간색 목도리, 검은색 계열 털모자, 허리에 두른 체크무늬 담요.

허름한 모습의 덩치 큰 이 남자는 한때 미남 피아니스트로, 기행으로 이름을 떨친 이보 포고렐리치(62)였다.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이날 연주할 쇼팽 전주곡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조명이 대부분 꺼진 무대에서, 포고렐리치는 조용히 건반을 두드렸다.

맑고도 깊은 피아노 소리가 콘서트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사이 관객들은 휴대전화나 프로그램 북을 들여다봤다.

일부는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포고렐리치는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후 무대에 앉아 차분히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으로 쌓아 올린 감정의 탑…이보 포고렐리치의 쇼팽
15년 만에 내한한 포고렐리치가 지난 19일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국내 관객에게 선보인 첫 곡은 바흐의 '영국 모음곡 3번'이었다.

호불호가 느껴질 만한 해석으로, 전통적인 연주 스타일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롱하고, 맑으며 감정 기복이 잘 느껴지지 않는 이 평온한 곡은 포고렐리치 손을 거치며 감정의 파고가 깊어졌다.

프렐류드는 유려했지만 둔탁했고, 사라반드는 지나치게 비장했다.

바흐 음악이라기보다는 베토벤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두 번째 곡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은 전반적으로 박력이 넘쳤다.

2악장은 바흐 곡보다 더 영롱했고, 마지막 4악장의 '론도: 알레그레토'는 질주하는 경주마 같은 거친 힘과 속도가 느껴졌다.

반복되는 주제와 삽입부는 회를 거듭할수록 이전 음들이 켜켜이 쌓이며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세 번째 곡으로 선보인 쇼팽의 '뱃노래'도 뛰어난 강약조절로 이목을 끌었다.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힘줄 부분에선 뱃사람의 기백이 느껴질 정도로 타건의 힘이 강력하고 묵직했다.

그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인 라벨 '밤의 가스파르'는 마지막 곡으로 선보였는데,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훌륭했다.

'물의 요정 옹딘'에선 물 위를 걷는 요정의 빠른 발걸음을 보여줬고, '스카르보'에선 초절 기교로 관객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시간으로 쌓아 올린 감정의 탑…이보 포고렐리치의 쇼팽
포고렐리치는 이날 바로크부터 인상주의까지 넘나들었다.

대단히 넓은 연주 스펙트럼인데, 일부는 좋았고, 일부는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하지만 네 번째 곡으로 선보인 쇼팽 '전주곡 C# 단조'만큼은 진정 탁월했다.

1980년 쇼팽 콩쿠르부터 대담하고 파격적인 연주로 논란의 대상이 됐던 포고렐리치는 수십 년간 쇼팽을 치면서 곡에 담긴 군더더기 감정들을 모두 걷어낸 듯 보였다.

그가 연주한 쇼팽은 마치 생물인 양, 관객 숨소리마저 빨아들이며 슬픔의 감정을 키워갔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 포고렐리치가 쌓아놓은 음은 곧 공기 중으로 흩어졌지만, 그가 남긴 감정의 정수는 씨앗이 되어 관객들 마음속에서 자랄 것 같았다.

포고렐리치는 '전주곡'에 이어 '밤의 가스파르'를 연주한 후, 쇄도하는 박수를 뒤로한 채 막스 오퓔스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지극히 우아한 인사와 함께 앙코르곡 없이 무대를 빠져나갔다.

시간으로 쌓아 올린 감정의 탑…이보 포고렐리치의 쇼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