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산업의 발달
말과 철의 결합 '철기병'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가락지 등 장신구 풍부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를 생산했다. 지린(吉林)성 북부 농안이나 대안지역에서는 지금도 말을 키운다. 나는 1995년 이곳에서 한 마리에 12만원씩, 세 마리를 사서 직접 타고 지안(集安)까지 내려왔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가다》). 목동이자 기마민인 주몽은 소수의 기마병으로 홀본부여를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북평(北平) 어양(漁陽) 등 현재의 베이징 근처까지 3000리(약 1200㎞)를 기마병으로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 첫해에 동몽골 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을 공격해 소·말·양 떼를 몰고 개선했다. 북방종족이나 한족과 본격적인 기마전을 벌이려면 말산업을 육성하고, 3월 3일의 국중대회처럼 인재를 뽑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말산업·제철산업 연계한 고구려

고구려는 경제강국, 군사강국이 되기 위해 말산업을 제철산업과 연결시켰다. 2세기에 들어와 원조선이 활용했던 자원 영토를 더 확장시켰고, 철 생산량을 늘렸다. 압록강 이남의 시중군, 중강군, 개천, 은률, 재령 등과 두만강 유역의 무산에는 풍부한 철광산이 있었다. 또 광개토태왕이 404년에 장악한 안시성·건안성·요동성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의 철 생산지였다. 고구려는 풍부해진 철광석을 원료로 기술력을 개선시켜 제철산업을 발전시켰다. 탄소 함유량이 0.5% 안팎인 강철 또는 주강 제품을 생산했고, 창 끝은 탄소 함유량을 0.31% 정도로 만들었다. 섭씨 1500도의 용광로에서 생산한 이런 강철 제품들은 현재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리태영 《조선광업사》).
유럽 기사보다 위력적인 개마무사

그런데 말과 철이 결합하면서 철제 재갈과 편자, 등자 등을 사용하는 철기병이 등장했다. 동천왕은 요동지방과 서안평(압록강 하구)을 놓고 위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인 246년에 철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이후 중무장한 철기병들이 등장하면서 기마전 양상에 혁신이 생겼다. 약수리 고분, 안악 3호분, 쌍영총 등에서 보이는 개마무사(갑옷 입힌 말을 탄 무사)들은 길이 3㎝에서 29㎝의 철편들을 이어 제작한 미늘갑옷을 착용했으므로 3m 넘는 긴 창을 들고 마상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또 타원형, 사다리꼴 모양의 철등자에 끼운 신발 바닥에는 철못들을 박아 보병들을 내려찍는 데 사용했다. 심지어 말도 철제투구, 철제다래, 꼬리장식품 등으로 무장시켜 방어력을 높이면서 위엄도 과시했다. 그로부터 1000여 년 후에 나타난 통짜 갑옷을 입고 장창을 찌른 유럽기사들보다도 더 위력적인 무장이었다.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황금의 나라, 고구려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