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식민 치하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물자를 생산하던 일본육군 조병창으로, 해방 이후에는 주한미군의 보급부대가 들어서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연합뉴스는 9일 임시정부 수립 100년, 3·1운동 100년의 해를 보내며 한반도 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증거인 조병창 유적 내부를 전문가들과 함께 국내 언론 최초로 취재했습니다.
1939년 문을 연 일본육군 조병창은 한강 이남 최대의 군수물자 생산지였습니다.
부평역사박물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조병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9천정, 총검 1만정, 소형 폭탄 2천800개, 중형 폭탄 2천개에 달했습니다.

공장 내부에서는 육각형 모양의 주물화로 입구를 해방 후 시멘트로 봉쇄한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우식(95) 할아버지는 17살 나이에 조병창에서 일하면서, 해가 뜨기 전 공장에 나가 해가 진 후 돌아오는 생활을 날마다 반복해도 굶주림은 계속됐다고 증언합니다.

일본과 중국에 있던 조병창은 모두 철거됐지만 부평 조병창 시설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 미군기지로 편입된 탓에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본풍의 붉은 벽돌 외벽 위에 서양식으로 시멘트를 덧씌운 건물도 곳곳에 있고, 길이가 긴 쪽의 가로변 중앙의 출입문을 나무로 막고 짧은 세로 변에 출입문을 새로 낸 건물은 미국의 생활양식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아픈 역사이지만 기억해야 하는 역사라며 조병창 시설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천시도 조병창 시설을 보존해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80여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오는 조병창,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