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느린 풍경 속으로 기차가 달려간다. 누구에게나 기차여행은 추억이라는 이름과 맞닿아 있다. 기차여행하면 계란과 사이다를 연상하는 중년을 훌쩍 넘어선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바다열차나 눈꽃열차를 타고 데이트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신세대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가장 길게 여행한 것은 지금은 사라진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동해바다로 일출을 보러 떠난 여행이었다. 밤에 떠난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동이 터오를 무렵 바닷가에 도착했다. 레일크루즈 해랑을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은 바로 그 느림을 경험하는 여행이다. 기차에서 잠을 자면서 떠나는 1박2일의 기차여행은 그동안 경험했던 허다한 침대기차여행과 비슷하기도 하고 또 세세한 부분에서 달랐다.

2008년 국제열차로 개발한 특별한 열차

기차는 서울역에서 오전 8시40분 출발했다. 우아한 외면과 달리 해랑은 KTX에 절반도 안 되는 속도로 천천히 레일을 미끄러져갔다. 서울에서 첫 번째 목적지인 경주까지 가는 데만 4시간이나 걸린다. 기차여행은 사실 쉽지 않다. 종일 이어지는 기차 진동을 몸으로 받고 있으면 생활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기차여행이 좋은 것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으니 마치 사색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방은 아담했다. 작은 의자와 커다란 창 그리고 더블침대보다는 작고 싱글침대보다는 큰 침대가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방옆에 문을 열면 화장실과 세면대가 놓여 있다. 벽에는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와 온도조절장치(에어컨디셔너)가 달려 있다. 시선이 놓이는 쪽으로 문을 열면 화장실이 있다. 칫솔, 치약, 면도기 등 기본적인 것은 물론 샴푸부터 보디워시, 컨디셔너, 로션, 그리고 보디쿠션까지 비치돼 있다. 호텔방을 조금 작게 축소해 놓은 형태다. 특급호텔을 연상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방은 불편하지 않았다.

해랑은 확실히 다른 나라의 기차와는 다르다. 원래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에 맞춰 부산을 출발해 평양에서 북한 응원단을 태우고 베이징까지 가는 국제열차로 개발됐으나 계획이 무산됐다. 코레일은 차량을 일부 개조한 뒤 2009년 10월부터 관광열차로 활용했다.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그러다 보니 유럽이나 캐나다에서 봤던 기차와는 다르다. 국토가 넓은 캐나다 같은 곳은 침대열차를 타는 사람이 많아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캐나다 열차는 방안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의자를 젖히면 편안한 침대가 내려오는 구조로 돼 있다.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는 샤워실도 공용으로 쓰는 경우가 흔했다. 심지어 2층 혹은 3층 침대가 놓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해랑은 유럽 침대열차에 비하면 고급스러운 편이다.

수학 여행의 추억 불러일으키는 경주 여행

해랑열차는 1박2일 일정과 2박3일 일정으로 나뉜다. 1박2일의 경우 전라도 지역을 여행하는 서부권과 경주를 거쳐 정동진으로 가는 동부권으로 운행된다. 객실은 6칸이고 카페칸과 이벤트룸이 합쳐진 8개의 객차가 연결돼 있다.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카페칸에 가보니 김밥과 음료 과일, 차 등이 놓여 있다. 모두 무료로 제공된다.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저녁이면 식당칸에는 와인을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며 여행의 여흥을 즐기는 곳으로 변신한다.

기차는 4시간을 달려 어느새 경주역에 도착했다. 기차 안에 카페칸이 있지만 술과 음료, 다과만 제공할 뿐 본 식사는 지역의 유명 식당에서 한다.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식사를 마치고 관광에 나섰다. 먼저 둘러본 곳은 신라 천년 역사를 간직한 고분 단지인 대릉원이다. 쉽게 말하면 왕과 왕비의 무덤인 셈이다. 사실 경주는 대표적인 수학여행 장소였다. 지금이야 수학여행으로 해외도 가는 세상이 됐지만 40대 이상의 중년들에게는 경주는 수학여행지로 선명하게 각인돼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1970~1980년대 회상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도 수학여행지로 경주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런데 막상 대릉원에 와보니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세월이 망각을 불러일으켰거나 수학여행이라는 해방감에 들떠 경주의 유적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탓이리라.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대릉원을 보니 천년 역사 신라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살아오는 듯하다. 알면 조금 더 깊게 보인다고 고등학교 때 스치며 지나갔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다. 흔히 안압지라고 불리는 동궁과 월지는 전통의 미와 현대의 조명이 만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예쁜 야경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불국사는 어린 시절 봤던 것보다 더 우아하고 고졸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고 난 뒤 다시 기차로 돌아왔다.

효도관광 중소기업 단체여행객이 가장 많아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5호차에 있는 포시즌 라운지(이벤트룸)에서는 영화 시청을 하거나 마사지 네일아트 등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저녁시간이 되자 공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해랑 승무원들의 소고 공연에 이어 초청가수의 공연이 펼쳐졌다. 기차를 탄 이들은 가족여행객이 가장 많았고, 중소기업의 단합회를 겸해서 기차여행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늙은 노모를 모시고 기차를 탄 아들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마음도 찡하게 만들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살뜰하게 보살폈다. 사연을 묻지 않았지만 간곡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떤 부부는 남편이 나훈아의 ‘사랑’을 부르자 속절없이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와인을 마시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각자의 사연을 싣고 기차는 어둠 속을 질주했다. 해랑은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나 부모님 효도관광 등의 목적으로 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만 요금이 비싼 편이어서 젊은 층의 이용률은 떨어지는 편이다. 주 이용객이 평균 연령이 높은 분들(중장년층이나 노년층)이나 중소기업의 연수 목적으로 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술기운이 올랐는데도 덜컹거리는 기차의 진동 때문인지 여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나라 열차와 달리 침대가 달리는 방향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진동이 더 큰 탓인지도 모른다. 뒤척거리다 일어나니 어느새 정동진이다. 해랑 열차의 장점 중 하나가 정동진의 일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던 정동진역은 다른 기차여행지와 달리 기차에서 내리기만 해도 일출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일출은 충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태양이 올라가는 듯하다가 구름 속에 퍼져 버렸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정동진의 매력적인 레저 활동이기도 한 레일바이크를 타러 갔다. 예전에는 레일바이크가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굴려야 하는 힘겨운 레저였지만 전동화가 이뤄지면서 레버만 간단히 조작해도 편안히 움직였다. 레일바이크 주변에는 아름다운 바다가 출렁인다.

태백 한우를 먹고 난 뒤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오후 6시52분. 서울역에 멈춰선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차여행객들은 조금은 피곤하지만 행복한 미소를 띤 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여행메모

느릿느릿~철길 따라 추억을 싣고…덜컹덜컹~차창 밖엔 설렘이 가득
코레일 관광개발에서 운영하는 해랑열차는 스위트, 디럭스, 패밀리, 스탠다드 4가지 객실타입으로 돼 있다. 2인 기준으로 디럭스는 160만원부터. 기차를 타면 연계 버스와 열차 내 숙박, 식사, 간식, 입장료와 체험료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한다. 바캉스 여행 기간 동안 스페셜코스 일정이 마련된다. 인기 여행지인 여수, 부산, 거제, 외도, 정동진, 평창을 둘러보는 바캉스 스페셜 코스는 여름휴가 기간 내 단 2회만 출발한다. 스페셜코스 바캉스 2박3일 일정은 7월 19일(금), 8월 9일(금)이며 서울역에서 8시30분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