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2770억달러로 한국의 주식시장의 15%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1927년 증권거래소가 개설됐을 정도로 필리핀 주식시장은 아시아에서 역사가 깊은 시장에 속한다. 그리고 최근 10년간 필리핀 주가지수 상승률은 190%(달러 기준)로 미국 다우존스지수(190%)와 비슷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한국 코스피 상승률은 50%에 그쳤다.

필리핀 주식시장의 상승은 소위 필리핀의 ‘재벌’로 불리는 대형 복합기업이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필리핀의 복합기업으로 구성된 지주회사 섹터는 최근 10년 동안 380%(달러 기준) 올랐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올해 초 타계한 필리핀 최고 부자인 헨리 시(Henry Sy) SM그룹 회장의 순자산은 190억달러(약 22조5967억원)로 세계 부자 순위 53위에 랭크됐다.

필리핀의 복합기업들은 어떻게 이런 부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먼저 필리핀의 복합기업은 이름이 말해주듯이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의 안정성을 강화한다. 필리핀에서는 다른 국가에 비해 사업 확장 규제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필리핀은 한국과 달리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간 영역을 나누는 금산분리법(은행법, 공정거래법, 금융지주회사법 등)이 없다. 이런 덕분에 복합기업이 대형은행을 소유, 경영할 수 있다. 실제로 쇼핑몰과 백화점을 운영하는 SM그룹은 점유율 1위 은행인 BDO의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다. 스페인계 부동산 재벌인 아얄라그룹 역시 2위 은행인 BPI의 최대주주다.

또 다른 복합기업인 JG서밋은 부동산 개발업체 로빈슨랜드, 항공사 세부 항공, 전력회사 멜라코, 그리고 1등 통신회사 PLDT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복합기업이 사실상 국가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식시장에서도 복합기업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복합기업의 합산 시가총액 비중은 30%로, 자회사까지 포함하면 50%가 넘는다.

필리핀 복합기업들이 이 같은 경제적 지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배 그리고 1970~1980년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꾸준히 부를 축적해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필리핀의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민간 기업의 투자 없이 경제 성장이 어려웠던 현실도 작용했다. 마닐라의 신공항은 맥주 브랜드로 유명한 산미구엘그룹의 투자로 건설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필리핀 복합기업의 지배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보유한 자금과 글로벌 네트워크 없이 필리핀의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이들의 역할과 위상은 계속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