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5월26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는 모습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5월26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는 모습 /청와대 제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시 장막 뒤로 사라지고 있다. 블라디미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밀린 숙제하듯 마쳤으니, 당분간 김정은은 대외 행보를 자제할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중국엔 벌써 세 번을 다녀왔다. 서먹하던 베트남과도 하노이 미·북 2차 정상회담을 계기로 관계를 복원했다.

배후를 튼튼히 한 다음의 전략은 수성(守城)이다. 적어도 공성전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이 섰을 것이란 얘기다.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두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이 나를 사담 후세인으로 보지는 않는구나’란 깨달음이다. 미국은 하노이 회담에서 종전선언은 물론이고, 평화협정까지 맺을 태세였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단서가 달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달라진 태도는 김정은이 얻은 몇 가지 것들 중 가장 큰 소득이다. 2017년 말에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은 누구의 ‘핵단추’가 더 큰 지 자랑했었다.

‘평양성’으로 복귀한 김정은이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핵·경제 병진으로의 회귀다. 비록 공식화하진 않더라도 사실상 그런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은의 행위 목록에서 제외될 건 딱 한가지다. 장거리탄도미사일 실험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만 자극하지 않으면 된다는 얘기다. 핵활동에 관해선 거의 모든 행위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영변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과 강선 등 알려지지 않은 비밀 고농축우라늄 시설들은 지금도 온전히 가동되고 있다. 김정은이 마지막 단계에 팔아먹을 핵무기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겸직하고 있던 통일전선부장 자리를 새 얼굴에 맡기고, 미국과의 핵협상을 위한 간판을 ‘외무성 라인’으로 교체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한다. 비핵화 협상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김영철의 등판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해왔다. 군부를 대표하는 김영철을 전면에 내세운 것 자체가 김정은의 ‘구두’ 비핵화 의지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증좌로 기능했다. 김영철은 김정은을 제외하고, 북한 내 어떤 이들보다 북한의 핵무력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정은은 최악의 경우 미국과의 협상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으로 김영철을 내세웠다.

‘평창 이후’ 김정은은 계산없을 만큼 많은 이득을 얻었다. 고모부를 총살형에 처하고, 이복형을 암살했어야 할 정도로 그는 불안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마련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모든 걸 바꿔놨다. 김정은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미국 정상과의 회담을 두 번이나 성사시켰다. 한·미 동맹에 균열을 내는 성과도 거뒀다. 정상국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남쪽에선 그를 추모하는 세력까지 생겼다. 통일전선부가 수십년간 하고자 했던 일을 불과 1년여 만에 이룬 셈이다. 이런 점에서라도 김영철 교체를 문책이 아니라 영전이라고 보는 이들도 꽤 많다. 4차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문 대통령은 김정은을 향해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하릴없이 성문 열릴 날만 기다리는 세객(說客)의 신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박동휘 정치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