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윤인상 당시 재무부 차관이 ‘딱딱이’로 불리는 나무토막을 내리치며 대한증권거래소 개장을 알리고 있다.  /한국거래소 제공
1956년 3월 윤인상 당시 재무부 차관이 ‘딱딱이’로 불리는 나무토막을 내리치며 대한증권거래소 개장을 알리고 있다. /한국거래소 제공
“독일과 폴란드가 마침내 전쟁을 시작했다(獨波兩國軍遂開戰).”

1939년 9월1일. 경성 거리에 호외가 뿌려졌다. 유럽이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의 증권시장은 맹렬한 기세로 치솟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의 경험으로 투자자들은 유럽의 확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직감했다. 군수물자 특수로 인한 일본 경제 대호황의 재연이었다.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의 대(對)독일 선전포고가 잇따르자 증시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조선증권취인소(거래소) 대장주였던 ‘동신(도쿄증권취인소 주식)’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닷새 만에 주당 170원으로 35원(24%) 뛰어올랐다. ‘조신(조선증권취인소 주식)’ ‘조석(조선석유)’ 등 다른 일본인 소유의 조선기업 주식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명치정(명동) 중매점(증권사)들은 대박의 꿈을 안고 몰려드는 투자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장세를 한순간 뒤집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0년 9월 일제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면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것이다. 연합군이 석유 봉쇄로 대응하자 일제는 이듬해 12월 최악의 작전을 감행했다. 하와이 진주만의 미 태평양 함대를 전격 기습했다.

태평양전쟁 5년차에 접어든 1945년 8월. 종전을 예고하는 거대한 섬광이 일본의 군사도시 히로시마를 뒤덮었다. 반세기 조선인들의 눈물과 환희가 교차했던 조선의 마지막 증권거래소도 일제의 패망과 같은 길을 걸었다.

사라진 거래소

1956년 당시 지금의 서울 을지로2가에 있던 대한증권거래소 건물. 증권시장 개장을 자축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1922년 준공한 이 건물엔 처음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들어섰다.  /한국거래소 제공
1956년 당시 지금의 서울 을지로2가에 있던 대한증권거래소 건물. 증권시장 개장을 자축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1922년 준공한 이 건물엔 처음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들어섰다. /한국거래소 제공
‘조선증권취인소를 즉시 해산한다.’(1946년 1월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43호)

해방 직후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 군정은 조선증권취인소의 폐쇄를 공표했다. 일본인 소유 자산의 몰수 과정에서 껍데기만 남아 있던 취인소에 내려진 ‘사형 선고’였다. 이로써 19세기 말 곡물 거래를 시작으로 성장해온 조선의 자본시장은 완전한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조선 최초의 거래소는 미두취인소였다. 일제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한다는 명목으로 1896년 인천에 처음 미두취인소를 개설했다. 현물 없이 미래의 쌀을 거래해 지금의 선물시장과 비슷했다.

주식 거래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 일본인 유입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처음엔 ‘문옥(問獄)’으로 불리는 전문 중매점이나 잡화점에서 일본 주식을 사고팔았다. 그러다 1920년 한 단계 발전한 시장인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등장했다. ‘경취’로 불리는 이 시장은 거래소 근거법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인(9명)과 일본인(17명)이 세운 회사였다. 경취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호황에 힘입어 1922년 명치정에 최신식 3층 사옥을 올리면서 한국 자본시장의 심장을 뿌리내리게 했다. 하지만 이듬해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과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 등의 여파로 영업난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증권거래소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 야심이 커지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조선을 군수공업 기지화하는 과정에서 1931년 5월 ‘조선취인소령’을 제정했다. 이 명령에 따라 경취는 ‘인취(인천미두취인소)’와 하나로 합쳐졌다. 조선취인소는 중·일전쟁 특수에 힘입어 조선 증권거래소의 전성기를 열었다. 군수산업 주식이 계속 늘어나면서 1938년에는 284종목에 달했다. 수수료 수입으로 매년 액면금액의 7~18% 배당금도 지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제의 폭압과 수탈이 극에 달하던 1943년. 조선총독부는 전시 채권 소화 등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취인소를 ‘영단제(營團制)의 특수법인’ 조직으로 재편했다. ‘조선증권취인소’란 새 현판도 내걸었다. 조선 거래소의 마지막 이름이었다.

‘증권구락부’의 탄생

“어떻게든 증권시장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1947년 여름 서울 남대문로2가 지요다(千代田)빌딩. 일제강점기 증권산업에 종사했던 40여 명이 지하 양식당에 모여 증권시장 재건 필요성을 논의했다. 취인소나 중매점에서 일하다 공무원, 자영업자 등으로 변신한 이들은 증권산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단순 친목으로 출발한 모임은 그해 9월 한국증권구락부(클럽) 결성으로 이어진다. 금융투자협회 뿌리인 이 구락부의 이사장은 일제강점기 금익증권을 경영한 송대순 씨가 맡았다. 동아증권을 경영한 조준호 씨(사보이호텔그룹 창업자)가 참여했고, 김용주 전방 창업자도 뜻을 같이했다. 구락부는 증권매매 규약을 마련하고 경성방직,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조선화재해상보험 등 ‘적산(敵産)’으로 불리는 국내 귀속 일제 기업의 주식을 수집하고 매매했다.

다만 최종 목표인 거래소 설립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당시 한반도는 북한의 전력 차단 등 크고 작은 충돌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속에 일제의 수탈 창구로 낙인찍힌 증권거래소의 개설 노력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한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 초대 회장에 오른 송 이사장은 “증권인으로서 가장 쓰라린 때”라고 회상했다.

희망의 불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구락부가 결성된 뒤 2년 가까이 지난 여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을 넘긴 1949년 8월18일. 김도연 초대 재무부 장관은 “거래를 공식화해 암매매의 폐해를 없앤 뒤 거래소 복구 준비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혀 증권인들을 흥분시켰다. 구락부 회원들은 그해 11월 합심해 해방 후 1호 증권사 대한증권(현 교보증권)을 설립했다. 일부는 옛 취인소 건물 돌계단에 앉아 ‘입회장에서 호가를 외치던 시절’을 떠올리며 증권시장의 부활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이듬해 6월25일 발발한 전쟁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동란 속에서 성장한 증권업

이승만 정부가 1950년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토지 소유자에게 보상 차원에서 발급한 지가증권.  /증권박물관 제공
이승만 정부가 1950년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토지 소유자에게 보상 차원에서 발급한 지가증권. /증권박물관 제공
한민족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6·25전쟁 속에서 국내 증권산업은 뜻밖의 호황을 맞았다.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몰려든 피란민 사이에서 ‘지가증권’과 ‘건국국채’ 거래가 급증한 결과였다. 지가증권은 이승만 정부가 농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지주들에게 땅값 명목으로 배정한 채권이다. 1950년 3월 전체 농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작농에게 땅을 나눠주고, 땅값을 5년간 나눠(생산량의 30%씩 현물 납부) 치르게 한 농지개혁법의 부산물이었다.

생계가 급했던 지주들은 1951년 1·4후퇴 이후 부산 광복동에 자리잡은 대한증권을 찾아 지가증권을 헐값에 처분했다. 액면가치 20%대의 헐값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 재산 불하(매각) 때 지가증권으로 매수 대금을 치를 수 있게 하면서 증권사를 드나드는 자산가가 늘었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은 1952년 소화기린맥주(현 오비맥주)를 불하받으면서 잔금 일부를 싸게 매수한 지가증권으로 지급했다. 최종건 SK그룹 창업자는 1953년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는 1952년 조선화약공판(현 한화)을 사들일 때 대금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결제했다.

전비 조달을 위한 건국국채 발행도 증권매매의 활성화를 이끈 한 축이었다. 무역상들은 통관 과정에서 의무 매입했던 건국채권을 고물상이나 증권업자에게 팔아 현금화했다. 쏟아지는 지가증권과 건국국채 중개 덕에 대한증권은 전시 부산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세금을 내기도 했다. 대한증권의 성공에 자극받아 무허가 증권업자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정부는 폐해를 막기 위해 정식 증권회사로의 변신을 적극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1952년 제2호 증권회사인 고려증권이 면허를 얻었고 1953년에는 영남, 국제, 동양이 차례로 증권사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대한증권거래소의 탄생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총성이 멈추자 5개 증권사는 본격적으로 증권시장 개설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해 11월 사단법인 대한증권업협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8월부터 매일 협회사무실에 모여 지가증권과 건국국채를 매매했다.

숙원이었던 증권거래소 설립은 1955년 증권업협회 주도로 옛 조선증권취인소 건물 임대차 계약을 맺으면서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협회는 그해 공동출자로 설립한 한국연합증권금융(현 한국증권금융) 자금으로 전란에 무너진 건물을 새단장하며 설레는 날을 보냈다.

마침내 1956년 2월 증권사·은행·보험사들이 각각 1억환을 출자해 자본금 3억환의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설립 등기를 마쳤다. 다음달 3일에는 증권거래소 개소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행사가 끝나자 거래소 직원은 10년여 만에 증권거래 재개를 알리는 ‘딱딱이’를 내리쳤다. 여기저기서 호가를 외치는 증권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입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