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전남 곡성에서 만세를 주도했던 신태윤이 건립한 곡성 단군전. 일제는 어용사학자들을 동원해 단군신화를 왜곡·말살하려 했다. 지성사 제공
3·1운동 당시 전남 곡성에서 만세를 주도했던 신태윤이 건립한 곡성 단군전. 일제는 어용사학자들을 동원해 단군신화를 왜곡·말살하려 했다. 지성사 제공
그리스·로마신화의 그 복잡한 신의 계보와 주특기까지 줄줄 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책은 물론 영화, 만화영화, 만화책, 각종 게임 등으로도 만들어져 어린이부터 기성세대까지 공부하고 즐길 수 있게 돼 있다. 드라마틱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물론 대립과 갈등, 사랑과 배신 등 스토리가 풍부하고 재미있어서다. 우리 신화는 어떤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신화는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신화가 디테일 없이 축약된 채 전해져온 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왜곡되기까지 한 탓이다.

[책마을] 땅으로 떨어진 박혁거세 유해… '오시리스 신화'와 닮았네
《신화는 두껍다》의 저자는 우리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역사 속의 신화’와 ‘신화 속의 역사’에 담긴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찾아나선다. 천지가 개벽하는 개국신화를 시작으로 단군,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 등 잘 알려진 영웅들은 물론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시조였으나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온조, 뛰어난 책략으로 이주민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신라의 탈해, 남성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소외됐던 유화, 알영, 소서노, 허황옥 등 여성 인물도 불러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국내 자료는 물론 삼국지, 후한서, 법원주림, 통전 등 중국 자료까지 망라해 신화와 역사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책은 우리 역사에 나타난 고대왕국들의 건국신화를 주로 다룬다. 창세신화를 시작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제국에 이르는 건국신화를 역사의 전개과정에 따라 검토하고 해석한다.

건국신화의 문을 처음으로 연 환인과 그의 뜻을 받들어 땅에 내려온 환웅, 쑥과 마늘이라는 시련의 통과의례를 거쳐 인간이 된 웅녀,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단군에 이르는 과정을 저자는 ‘3대에 걸친 건국신화의 완성’이라고 설명한다. 국내든 중국이든 관련 자료가 풍부하지 않다는 점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은 당시로선 첨단기술이었던 청동기문화와 관련한 신성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천부인은 제정일치 사회의 통치권과 사제권을 상징하는 신성한 기물로 볼 수도 있고, 환웅이 환인에게 신탁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신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저자에 따르면 또 환웅이 거느렸던 3000의 무리와 풍백, 우사, 운사는 환웅을 지원하는 세력이자 통치를 위한 관료 조직이다. 환웅이 세운 신시(神市)는 그의 우월한 존재감과 초월적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자 통치행위가 이뤄지는 정치와 문화의 복합공간이었다. 이 신화의 등장인물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자면 은나라가 망한 뒤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은나라 유민으로 볼 수도 있다.

고대국가 부여의 역사와 함께 묻혀버린 동명신화와 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 이야기, 하늘의 명으로 부여를 떠나 부여계 건국신화의 중심에 선 부루, 물의 신 하백의 딸로 태어나 스스로 신화를 쓴 유화 등 까마득한 옛적의 이야기들이 역사와 신화를 씨줄과 날줄 삼아 흥미롭게 펼쳐진다. 예컨대 ‘유리가 고구려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바치니 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어 이를 맞추자 피를 흘리며 이어져서 칼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저자는 부자관계의 확인을 넘어 무력충돌 같은 갈등과 대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고, 그로부터 7일 후 유해가 다섯으로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신화의 전형적 구조지만, 유해가 땅에 떨어지는 건 이례적이다. 저자는 여기서 오시리스의 사체를 조각 내 땅에 뿌렸다는 내용이 농부가 씨를 뿌리는 시기에 행해진 파종의례로 해석되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를 떠올린다. 혁거세의 죽음은 농경신화의 곡신(穀神)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혁거세의 능으로 조성된 경주 오릉과 다섯 방향으로 흩어진 유체는 오곡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락국을 건국한 수로는 대대로 내려오던 9개의 씨족집단 수장인 9간(干)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가운데 구지봉으로 강림했다. 이때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든 금궤를 9간의 하나인 아도간의 집으로 옮겨 거기서 수로왕과 나머지 5가야의 지도자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도간이 9간의 대표 역할을 했으며 수로왕 체제라는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 그의 집에서 시작됐음을 의미한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아도간은 가야국의 4대 왕 때에야 왕비를 배출했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데려온 측근 신보와 조광의 딸이 2대와 3대 왕의 왕비가 됐기 때문이다.

신화를 읽는 재미는 스토리의 전개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에 있다.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한 저자가 신화와 역사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이야기와 해석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우리 신화들을 잘 해석하고 가공해서 더 읽히고 소비되는 콘텐츠로 키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