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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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의 평온한 모습 아래에는 숨 가쁜 발길질이 있다. 로펌들의 2017년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정부의 규제 강화 추세로 ‘먹거리’가 많아졌다고 한 해지만 로펌들엔 녹록지 않았다. 시장이 요구하는 전문성 수준은 높아졌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아차’ 하면 로펌도 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졌다. 일부에선 구조조정으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적당한’ 수준의 여러 팀을 유지하던 기존 로펌 체계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이 명백해진 2017년이었다.

“뜨는 조세·공정거래 잡아라”

[Law & Biz] "졸면 죽는다"… 로펌들, 새 먹거리 찾기 '물밑 경쟁'
올해 대형 로펌들은 조세와 공정거래 분야 강화에 공을 들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관련 수요가 늘었고, 대형 로펌의 전문성이 필수적인 분야라서다.

국내 최대, 세계 8위 규모의 김앤장 조세팀은 조세 분야에서 강자의 면모를 재차 확인했다. 해외 평가기관에서도 굵직한 상을 탔다. 광장 조세그룹의 활약도 못지않았다. 통신사 단말기 보조금에 부과된 1860억원 규모의 부가가치세 취소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었다. 1100억원대 상속세 취소 사건,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의 취득세 취소소송 등 사회적 영향이 큰 사건을 대거 맡았다. 광장 공정거래팀은 국내 회사를 대리해 미국 법무부의 자동차 부품회사 관련 담합 조사에 대응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혔다. 국제통상연구원을 설립한 것도 업계에서 의미 있는 변화로 꼽힌다.

세종은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영입하는 등 공정거래팀을 대폭 강화했다. 디지털포렌식연구소를 설립해 조세와 공정거래 분야에서 확대되는 디지털포렌식 수사·조사에 대응하도록 했다.

율촌은 김앤장 못지않은 강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한국가스공사의 820억원대 관세 취소소송, 크레디트스위스 주식워런트증권(ELW) 법인세 취소 소송 등 굵직한 조세 소송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공정거래그룹에서도 대형 유통업체를 대리해 시식행사 관련 대규모유통업법 위반 사건에서 공정위에 맞서 취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승소율도 업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화우는 ‘원스톱 조세전문그룹’을 설치했다. 세무법인 화우를 출범시키고 조세심판부터 법원 행정소송까지 원스톱 조세 서비스를 완비했다. 국내 조세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임승순 대표변호사가 전방에 나섰다. 세무법인 화우에는 ‘조사통’ 김요성 세무사(전 국세청 세원정보과장), 기영서 세무사(전 국세청 법인납세국장) 등을 비롯한 세무 전문가가 포진해 뒤를 받쳤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조세와 공정거래에서 밀리면 로펌 먹거리가 확 줄어든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며 “선두에 나선 김앤장을 다른 로펌들이 맹렬히 뒤쫓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로펌들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경쟁에서 밀려난 일부 로펌에서는 공정거래팀 주요 멤버가 대거 이탈하는 ‘구조조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공정위 출신 인재를 영입하려는 로펌의 물밑 작업도 더 치열해졌다.

“혁신 없으면 도태”… 위기감 커진 로펌업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글로벌 로펌 도약을 위한 해외 진출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광장은 미래지능정보그룹을 설립하고 빅데이터, 인공지능, 핀테크(금융기술), 블록체인 등 관련 고객을 위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했다.

정보기술(IT) 분야에 강점을 지닌 세종은 방송정보통신팀의 활약이 컸다. 의료·제약·바이오 분야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출신인 김현욱 변호사와 주광수 전 바이오의약협회 부회장(고문)을 영입했다. 올해 베트남에 진출한 세종은 첫해부터 대형 인수합병 컨설팅을 성공시키며 안착했다.

화우는 기존 신기술 태스크포스를 4차산업혁명팀으로 확대 개편했다. 스마트카, 드론(무인 항공기), 사물인터넷, 헬스케어, 바이오 등 4차 산업 분야 전반의 전문성을 강화했다.

해외 진출도 활발했다. 베트남이 특히 뜨거웠다. 세종이 올 1월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일곱 개 로펌이 베트남에 둥지를 틀었다. 김앤장도 베트남 전문가인 안우진 미국 변호사를 영입해 베트남 진출을 준비 중이다. 화우는 베트남을 시작으로 동남아 진출을 강화하기로 하고 로펌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해외 진출 선도 로펌인 지평은 올해 해외 진출 10주년을 맞았다. 지평은 베트남 호찌민과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베트남 하노이, 캄보디아 프놈펜, 라오스 비엔티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미얀마 양곤, 러시아 모스크바, 이란 테헤란까지 아홉 개 해외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수십 년간 별다른 혁신 없이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대형 로펌이 위기감을 크게 느낀 한 해였다”며 “올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에 따라 몇 년 뒤 로펌 순위가 크게 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