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진통 끝에 아기를 품에 안았고 "딸입니다"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 딸~' 하는 뿌듯함이 들었다. 꼭 딸을 낳고 싶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친정엄마를 생각하던 그 느낌을 떠올리니 평생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안도감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것 같다.
딸 키우는 재미가 뭔지 모른 채 18개월 동안 육아의 늪에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던 그때, 예정에 없이 둘째가 덜컥 생겼다. 첫째 때와는 달리 내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동성 형제가 서로에게 좋다고 하니 딸이어도 좋을 것 같은데 또 어떤 날은 아들이면 시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남편도 같이 목욕탕 손잡고 갈 아들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내가 두 명을 다 챙기려면 힘들 텐데 하는 단순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임신 몇 주인가가 되면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것으로 법이 바뀌어 있었다. 첫째 때는 임신 중 교통사고를 당해 왠지 모를 불안감에 대형병원을 다녔지만 둘째는 동네 작은 병원에서 초음파를 봤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묻지도 않았건만 "딸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남편은 집으로 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나? 왜 묻지도 않았는데 성별을 알려줘. 난 모르는 게 좋은데!"라고 우회적으로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날 딱 하루는 나도 왠지 모르게 아쉽고 서운했다.
둘째 임신 사실을 안 날부터 시댁에서는 큰 딸이 별 뜻 없이 하는 행동에도 "남동생 보려고 저런다", "첫째가 주걱을 가지고 놀면 둘째는 아들이다"라며 무언의 기대감을 가지고 계시던 터였다. 아직 임신 중반도 접어들기 전이었지만 아들 타령이 더 이상 듣기 싫었던 나는 병원 진료를 마치고 오는 그날 바로 "딸이래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그 실망하시던 표정. 어르신들은 확실히 집안에 아들이 있어야 대를 잇는다고 생각하시니 뭐 어쩔 수 없었고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시어머님은 낙심한 표정으로 "뭐? 그럼 셋째 하나 더 낳아야겠네"라고 반사적으로 말씀하셨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출산보다 힘든 입덧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힘겹게 보내는데 내가 무슨 아들 낳을 때까지 애 낳는 존재인가 싶었다.
남들은 심하던 입덧도 3~4개월이면 지나면 서서히 잦아든다는데 어쩐 일인지 난 둘째 때도 7개월이 넘도록 밥 냄새조차 맡을 수 없어 내 인생 최고의 날씬한 몸매로 임신 기간을 보냈다.
밥알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 미치겠는데 첫째 아이 밥을 챙겨 먹여야 하는 그 최악의 상황.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리라.
시어머님은 지금도 손주들을 끔찍이 예뻐하시고 엄마인 나보다도 더 살뜰히 아이들을 챙기시지만 아직도 손자에 대한 미련은 홀로 버리지 못하셨다.
"애가 셋이면 내가 좋은 거 아니다. 다 너희들 부부가 좋은 거지. 늙어봐라. 자식밖에 남는 거 없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까 내가 힘 있어서 봐줄 수 있을 때 얼른 낳아라. 응?"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 얘기를 들었지만 딸 둘 키우는 재미가 요즘 여간 쏠쏠하지 않은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서운하지가 않다.
"푸하하하. 뭐? 남동생? 동생도 아니고 남동생 ㅋㅋㅋ."
보나 마나 내가 셋째 낳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자 할머니께서 손녀들을 데리고 "엄마한테 남동생 낳아달라고 해봐"라고 주문하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난 두 딸에게 엄마가 지금 동생을 가지면 달라질 그들의 일상을 들려줬다.
"엄마는 입덧으로 몇 달 동안 밥도 못 먹고, 낳으러 병원 가면 몇 주 동안은 집에 못 와. 그뿐인 줄 아니 밤이고 낮이고 아기는 엄마랑 붙어있어야 돼서 한동안 너희랑 키즈카페도 못 가고 산책도 못 가고 맨날 아기만 안아주고 젖 주고 돌봐야 해. 그래도 괜찮겠어?"
가뜩이나 지금도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워하던 딸들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음은 물론이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딸 둘 손잡고 외출하면 간혹 지나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이고 고것들 예쁘기도 하네. 그래도 아들은 하나 있어야 돼~ 더 늦기 전에 얼른 하나 낳아"라고 걱정들 하신다.
그분들은 아들 키우면서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는지, 현재 장성했을 아들은 어떤 면에서 딸보다 우월해서 '강추'하시는 건지 궁금해 진다. 내가 아들만 둘이었으면 또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아들만 있어서 어쩌나"하셨겠지 하면서 웃어 넘기는 수 밖에.
최근 일련의 사태들로 '지금 때가 어느 땐데요? 이제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 시대라고요!!'라고 큰소리칠 수 없게 된 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쉽다.
우리에겐 딸·아들이 아닌 그냥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잘 키워내야 할 아이가 있을 뿐이다.
"딸 아들 구별말고 육아전쟁 승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