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스턴사가 개발한 스마트 후라이팬인 ‘큐’. 블루투스를 통해 레시피에 맞게 프라이팬 온도가 조절된다.
미국 헤스턴사가 개발한 스마트 후라이팬인 ‘큐’. 블루투스를 통해 레시피에 맞게 프라이팬 온도가 조절된다.
“미래 부엌은 더 똑똑하고 빨라지긴 하겠지만 그다지 재미는 없을 것이다.”

지난 10~11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스마트 키친 서밋’에 참가한 참석자들은 와이파이(WiFi·무선랜)와 블루투스가 지배할 미래 부엌에 대해 이렇게 전망했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은 이번 콘퍼런스에서는 주방을 중심으로 기술 혁명이 얼마나 깊숙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미국 스태그사가 개발한 스마트 커피포트 ‘EKG+’.
미국 스태그사가 개발한 스마트 커피포트 ‘EKG+’.
리모델링 전문 웹사이트 하우즈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2는 매일 주방에서 요리만 아니라 TV 시청, 휴식, 독서로 3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인이 집안에서 잠을 자지 않을 때 보내는 시간의 60%일 만큼 생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시간이 많은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적은 주당 3.7시간만 부엌에서 쓴다. 이는 세계 평균 6.5시간의 절반에 머무는 수치다. 그만큼 빠르고 효율적인 조리 방식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구글 같은 대기업은 물론 킥스타터처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투자받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도 이 같은 현상을 주목한다. 냉장고 문에 설치한 스크린을 통해 레시피를 찾아보거나 가족 일정이나 날씨 등을 확인하는 정도는 이미 현실이 됐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 가전 기업들은 속속 관련 제품을 내놓고 있다.

미국 준사의 인텔리전트 오븐. 식재료 조리 방법을 알려준다.
미국 준사의 인텔리전트 오븐. 식재료 조리 방법을 알려준다.
부엌 내 무선 기술을 이용해 식단과 식습관을 추적하는 팔찌를 믹서기, 냉장고, 저울과 연결하는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 이런 기술이 모이면 취향에 맞는 냉장고 속 과일을 찾아 살찌지 않는 적절한 칼로리의 과일 음료를 부엌에서 만들 수 있게 된다. 부엌 오븐도 음식을 굽거나 덥히는 용도로만 쓰이지 않을 전망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고기와 생선을 구울지는 물론 조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언제 식사를 시작할지 가족의 스마트폰에 문자를 보낼 수도 있다. 냉장고가 가격이나 유기농 여부를 따져 제철 채소나 과일을 직접 주문하는 시대도 눈앞에 왔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이 우리 부엌 식탁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데까지 5~10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AI가 음성인식 기술과 결합하면서 명령만 내리면 원하는 요리를 해주는 주방기기도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할머니 불고기” “엄마표 라면”이라고 말하면 앞으로는 필요한 음식재료를 주문해 조리 시간에 맞춰 받게 된다. 가상의 로봇 셰프가 조리 방법을 알려주고 스마트 프라이팬은 요리 진행 상황에 따라 양파가 타지 않도록 꺼달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다.

또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어치웠는지, 냉장고에 있던 마지막 맥주를 누가 마셨는지까지 알려준다. 레베카 체스니 미국 푸드퓨처연구소장은 기조연설에서 “많은 연구자가 이처럼 미래 주방에서 일할 새로운 일꾼들을 개발하고 있다”며 “우리는 머지않아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지니어들은 주방의 모든 기기가 서로 대화할 수 있게 하려면 음식 재료가 생산되는 농장부터 음식이 접시에 담길 때까지의 전 과정을 정확히 추적하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애플의 다운로드 플랫폼인 ‘아이튠즈’ 같은 레시피 데이터베이스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식품 플랫폼 벤처회사 인잇은 레시피를 다양한 당분과 단백질 단위까지 쪼개서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AI가 학습을 통해 요리에 맞는 양념을 알아내고 식성에 맞는 레시피를 제시한다. 무선랜을 통해 음식을 인식하고 조리법을 알려주는 오븐을 개발한 주방기구 회사 준의 닉힐 보걸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창업자는 “사람이 연습한 것보다 훨씬 숙달된 음식 솜씨를 내도록 지원하는 주방 기구가 머지않아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부에선 이런 기술 발전이 조리 시간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지만 요리의 참맛과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굳이 레시피를 기억할 필요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이다. 차량에 내비게이션이 생긴 뒤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현상과 비슷하다. 우연한 실수를 통해 새로운 레시피를 발견하는 짜릿함이나 식재료 상태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요리가 사라질 것이란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미국의 유명 요리책 저술가이자 요리사인 타일러 플로렌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레시피가 종이지도처럼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