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월화드라마 '피고인'


박정우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감방이 부여하는 ‘자유의 구속’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아내와 아이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그 증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워낙 큰 충격 때문인지 그의 기억은 단기적인 망각에 빠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기억은 망각이라는 기제를 끌어내 그 고통으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해준다. 하지만 망각 위에 누군가 조작해 놓은 기억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 기억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망각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하는 건 더 큰 고통이다. 그는 ‘기억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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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굳이 ‘기억’이라는 장치를 가져온 건 우연일까. 물론 이 장치가 ‘반전의 반전’을 만들어내는 기폭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은 마치 역할수행게임(RPG)에서 캐릭터가 앞으로 나가야 비로소 구조와 적들을 파악할 수 있는 던전(지하 미궁)이 주는 긴장감처럼, 향후 어떤 전개가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예상을 뒤집는 반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효과뿐일까. ‘기억’의 문제는 최근 들어 우리네 대중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그렇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의 기억이 그렇다. 우리는 알고 보니 모두 ‘피고인’이고, 그 죄는 바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망각의 저편으로 묻어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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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기억들. 그래서 때로는 이를 직시하지 않고 망각의 늪 저편으로 가라앉혀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픈 욕망이 꿈틀댄다. 하지만 그 망각 위에 누군가 조작한 기억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함정에 빠져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아파도 힘들어도 그 고통스런 기억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비로소 ‘기억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