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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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사이의 일인자(primus inter pares).’

개당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시계 시장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의 각축장이다. 그중에서도 스위스 명품 시계업체 바쉐론콘스탄틴은 21세기 들어 두각을 보이는 브랜드다. 하지만 명품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시계 명가(名家)’를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는 외부에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2005년부터 바쉐론콘스탄틴을 이끌고 있는 스페인 출신의 후안카를로스 토레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초고가 상품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세칭 ‘금수저’ 출신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장롱 등을 만드는 가구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시계 제작의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숫자’에 대한 사랑

토레스 CEO는 195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계 가구 제작자 아버지와 쿠바 이민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적 사정은 여유롭지 않았지만 토레스 아버지는 가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틈날 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을 바라보는 심미안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장인들의 작품에 대한 동경과 존중, 성실함과 인내 등의 가치를 배웠다고 토레스 CEO는 유럽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회상하곤 했다.

1960년 그의 가족은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를 했다. 어린 토레스는 낯선 환경과 프랑스어라는 새로운 언어에 잘 적응했다. 무엇보다 제네바에서 자신의 ‘천성’을 발견했다. ‘숫자’에 본능적으로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제네바 현지의 한 상업학교에서 수학과 계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숫자에 대한 사랑을 자신만이 지닌 ‘6번째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졸업한 뒤에는 회계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토레스 CEO는 숫자에 대한 애착과 관련해 “시계판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계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기회가 날 때마다 언급했다.

시계산업과 천생연분

하지만 그가 시계업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 때 학교 졸업 후 카뮈시계라는 지역 시계업체에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취직하면서부터다. 그곳에서 전통적인 시계 제작 과정을 바라보면서 ‘시계학(horology)’을 바라보는 눈을 떴다.

시계 제작에 관한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보고 배운 토레스는 1981년 보다 큰 무대인 바쉐론콘스탄틴으로 옮겼다. 1755년 스위스 시계 제작자 장마르크 바쉐론이 설립한 바쉐론콘스탄틴은 19세기에 시계 무브먼트 표준화를 주도한 업체였다. 20세기 들어서도 크고 작은 부침은 있었지만 1979년에 118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500만달러짜리 초고가 손목시계 ‘칼리스타(Kallista)’를 선보이는 등 만만찮은 ‘내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레스가 입사할 당시까지만 해도 바쉐론콘스탄틴은 오메가나 롤렉스, 카르티에 등에 뒤처진 수많은 ‘스위스 시계업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후 바쉐론콘스탄틴이 보여준 급속한 성장사에서 토레스의 역할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입사 초기 토레스는 본업인 회계 관련 업무뿐 아니라 시계 제작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두루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1988년에는 재무 총책임자 지위에 올랐다. 사내에서 개인적 성장과 달리 스위스 시계업계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재무 총책임 역할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경영권이 케터러 가문에서 셰이크 야마니 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이끄는 중동계 자금으로 넘어갔다. 회사 주인은 바뀌었어도 시계 제작의 핵심 자산인 장인과 직원을 지키는 데 토레스는 전력을 다했다. “장인들의 회사가 존엄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한 필수조치”라는 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동료 사이의 일인자’

‘신정권’하에서도 시계에 대한 열정과 깊은 조직 이해도를 인정받은 토레스는 회계뿐 아니라 내부 경영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바쉐론콘스탄틴을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1989년 그의 영역은 재무뿐 아니라 인사, 정보, 세일스, 일반 총무업무까지로 넓어졌다.

노력의 결실인지 행운도 따라왔다. 때마침 회사의 기초체력도 나날이 개선된 것이다. 초슬림형 제품과 투르비용(중력으로 인한 시간오차를 줄여주는 기능) 시계를 선보이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토레스가 중책을 맡은 지 3년 만에 회사의 매출이 두 배로 늘었다.

바쉐론콘스탄틴이 시계업계 강자로 위상을 되찾자 1996년 회사는 다시 스위스의 명품전문 그룹인 리치몬트에 매각됐다. 랑에운트죄네, 보메앤드메르시에, 카르티에, IWC, 몽블랑, 피아제, 반클리프앤아펠 등과 한 우산 아래에서 동등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2000년부터 토레스는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제품 개발과 생산을 모두 책임지게 됐다. “제품 디자인과 제작 등에 직접 관여하게 되면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운 믿을 만하며, 우아하고 조화로운 대상을 다루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다시 접하게 됐다”고 했다. 2004년에는 마케팅과 유통, 홍보 업무도 병행하게 됐다.

결국 바쉐론콘스탄틴이 창립 250주년을 맞이한 2005년 토레스는 입사 25년 만에 CEO에 올랐다. 이후 바쉐론콘스탄틴은 유럽과 중동 부유층뿐 아니라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며 스위스를 대표하는 시계브랜드로 자리를 굳혔다.

시계업계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지 10여년간 토레스 CEO는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최근 들어 스위스 시계업계는 제2의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부패척결 전쟁’을 시작한 이후 스위스 명품시계 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글로벌 시계 수요의 약 30%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부패척결 전쟁이 벌어지면서 럭셔리 시계 수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바쉐론콘스탄틴을 비롯해 스위스 시계업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스위스 시계수출은 194억스위스프랑으로 전년 대비 9.9% 감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스위스 주요 15개 시계업체 중 13개 업체 매출이 줄었다. 토레스 CEO는 최근 독일 일간 디벨트와 인터뷰에서 “2016년은 매우 힘든 해였지만 올해라고 해서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토레스 CEO 역시 시련을 맞이했다. 일각에선 장기 집권한 토레스 CEO가 2선으로 물러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리치몬드그룹 명예고문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란 보도도 있다. 그가 이번 고비를 넘지 못하고 물러나더라도 10년 가까이 바쉐론콘스탄틴을 ‘동료 사이의 일인자’로 키운 공은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시계업계의 중론이다. 끈기있게 단계를 밟아가며 동종업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토레스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