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오후 극장에서 유해진 주연의 영화 ‘럭키(사진 왼쪽)’를 보고 온 A씨.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고 JTBC 드라마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를 시청했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채널을 돌려 tvN의 드라마 ‘안투라지’를 봤다. A씨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시간을 얼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A씨는 지난 5월엔 영화 ‘곡성’, 9월엔 ‘밀정’을 재미있게 감상했다. 두 작품 모두 순수한 한국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리우드 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와 워너브러더스가 각각 투자부터 제작·배급까지 맡았다.

해외 콘텐츠와 자본이 ‘스텔스 전투기’처럼 국내 콘텐츠 시장을 흔들고 있다. 스텔스 전투기는 적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게 ‘은밀하게 조용히’ 다가가 공습한다. 한류 열풍에 도취한 사이 정작 안방은 이들의 ‘스텔스 공습’에 잠식당하고 있다. 이전과 달리 이 시장에선 국수주의를 강요하는 세력도, 국내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문화계는 반기는 분위기다. 이 공습이 더 큰 파괴력을 갖고 있는 이유다.

외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은 2010년 이후 급증했다. 2000년대만 해도 매년 한두 편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27편이 나왔다. 올해만 ‘굿와이프’ ‘끝에서 두 번째 사랑’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등 10여편이 쏟아졌다. 리메이크 대상도 우리와 비슷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가진 일본 드라마에서 최근 미국 드라마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미국 드라마 특유의 선정성 등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해외 작품 리메이크가 쏟아질 전망이다.

영화판은 더 크게 흔들리고 있다. 국내 4대 대형 배급사인 CJ E&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의 독과점 구조는 외국 자본의 공습으로 균열이 났다. 지난해 1위였던 CJ E&M은 올 상반기 월트디즈니와 이십세기폭스에 밀려 3위로 추락했다. 5위도 워너브러더스가 차지했다. 쇼박스는 4위에 그쳤고, 다른 두 배급사는 5위권에서 밀려났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외국 업체가 배급하는 한국 영화가 줄줄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워너브러더스의 ‘싱글라이더’ ‘VIP’ ‘악질경찰’, 이십세기폭스의 ‘대립군’ 등이다.

단순히 ‘거대 자본의 힘’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이들이 침투할 틈을 만든 건 국내 시장의 플레이어들이다. 매번 반복되는 국내 콘텐츠 소재에 소비자는 싫증을 느끼던 차였다. 해외 콘텐츠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자신이 즐겨 보던 외국 드라마를 한국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버전으로 볼 수 있게 되자 강렬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창작자들도 환영하는 눈치다. 콘텐츠 자체보다 캐스팅 등을 기준으로 투자·배급을 결정하는 국내 배급사의 관행에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분위기였던 것은 아니다. 1989년에는 할리우드 직배에 반대하는 한 영화감독이 서울 논현동 극장에 뱀을 풀었다. 외국 배급사가 한국에 직접 들여온 미국 ‘레인맨’이란 작품에 대한 반발이었다. 극단적 국수주의의 표현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콘텐츠 시장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소재 고갈, 콘텐츠가 아니라 외적인 요소에 매달리는 국내 배급사의 태도에 많은 사람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렇다면 ‘스텔스 공습’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할 무기는 무엇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콘텐츠 자체에 집중하기’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뱀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