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그리움의 다른 말
수배 중에도 차 향기 맡을 때면 일월산 골짜기의 고향집 떠올려
수감생활 마치고 동양학 연구하다 "차와 함께 새로운 삶 살겠다" 창업
되살려야할 한국의 차문화
정조의 과세·일본 차문화 유입에 경제개발시대 여유없어 전통 실종
보이차는 치유차
얹힌 것 내려주는 '흑차'에 속해
현대인, 머리 많이 써 기 위로 몰려 균형 갖게 해주는 보이차가 좋아
재테크 대상으론 '위험'
350g에 1억원 넘는 고가도 있어…품질 판단할 식견 없으면 투자 금물

수감생활을 마친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동양과 역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차 문화에 다시 한 번 매료됐다. 고민 끝에 그는 새로운 삶을 오래도록 그리워한 차와 함께하기로 했다. 2002년 그는 함께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던 동료들과 ‘지유명차’라는 차 전문 회사를 세웠다.
민주화 투사로, 변증법적 지평의 확대 한국경제사입문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 등 다양한 저서를 써낸 저술가로 살다가 ‘보이차 전도사’로 변신한 박현 지유명차 회장 얘기다. 그가 2002년 세운 지유명차는 전국에 30여개 점포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박 회장을 지난 29일 서울 운니동에 있는 한국문화정품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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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음료는 차…차 문화 다시 살아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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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차 문화가 확산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고도 했다. 박 회장은 “유럽과 미국 등에서 차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며 “외출을 해서 커피를 마시지만 가정과 직장에선 차를 마시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도 오래전부터 차를 마시는 고유문화가 있었다. 밀양 인근에서 2000년 전 차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됐고, 조선시대까지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차를 마셨다. 하지만 세 차례 충격을 겪으면서 한국의 차 문화가 약해졌다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 첫 번째 충격은 조선 정조시대에 왔다. 전 사회적으로 개혁하려던 정조는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차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많은 농민이 차나무를 베어냈고 생산과 소비가 모두 줄었다. 두 번째는 일제시대다. 일본의 차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차 문화가 왜곡됐고 전통적인 모습을 잃었다. 세 번째로 6·25전쟁 이후 경제개발 시대로 접어들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전통은 남아 있다. 박 회장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할 때 차 한 잔을 하자고 한다”며 “국민소득 1만달러 이하에선 차 문화가 꽃피기 어려웠지만 2만달러가 넘어가면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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얹힌 것을 내려주는 보이차, 현대인들에겐 필수
차 중에서도 보이차를 선택한 것은 특성 때문이다. 그는 차를 색이나 향이 아니라 성질에 따라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눴다. 박 회장의 분류에 따르면 마셨을 때 기운을 위아래로 끌어당겨 정신을 곧추세워주는 성질을 지닌 것이 녹차다. 피곤할 때 기운을 위로 끌어올려주는 상승작용을 하는 것은 홍차다. 그는 홍차를 일하기 위해 활력을 충전해주는 노동차라고 했다. 응어리져 있고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때 풀어주는 것이 우롱차와 같은 황차다. 정신이 해이해질 때 다잡아주는 것은 백차인데, 이는 전통이 끊어져 현재 남아 있는 차가 거의 없다고 했다. 속에 얹혀있는 것을 내려주는 것이 흑차다. 보이차는 흑차에 속한다. 박 회장은 “머리를 많이 써 기운이 위로 몰려 있는 현대인에겐 이를 내려줘 균형을 갖게 해주는 보이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이차는 마시는 방법도 다른 차와 다르다. 박 회장은 “녹차는 뜨거운 물로 달여내면 떫은맛이 강해져 60~70도 정도 미지근한 물로 우려내지만 보이차는 100도 정도 끓는 물로 우리는 것이 가장 맛이 좋다”고 했다. 보이차는 녹차나 홍차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가 되기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도 그 향과 맛이 깊어진다. 대신 오래 보관하면서 먼지 등이 묻어 있을 수 있어 우려낸 첫 물은 버리고 두 번째부터 마시는 것이 좋다는 게 박 회장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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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는 투자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문화
한국에서는 보이차를 재테크 수단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보이차의 특성 때문이다. 보관 상태 등에 따라 다르지만 생산된 지 50~60년 된 보이차는 한 편(보이차를 세는 단위, 350g 정도 보이차를 떡처럼 뭉쳐 편편하게 한 것)에 1억원 이상인 것도 있다.
박 회장은 보이차를 투자 대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보이차를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말만 듣고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보이차 품질을 직접 알아볼 만큼 식견을 갖추고, 되팔 수 있는 중개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비싼 보이차에 투자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보이차를 돈이 아니라 즐기는 문화로 바라봐 달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보이차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통 방식의 보이차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변형한 보이차를 선보일 계획이다. 박 회장은 “보이차와 약재를 섞어 차를 만들거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음료수처럼 우려낸 뒤 병에 넣어 판매하는 등 보이차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커피가 유행하는 것처럼 차도 인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보이차 종류와 마시는 법

인공적으로 발효 촉진 숙차, 자줏빛 가까운 색에 구수한 맛
보이차는 중국 남쪽 윈난성의 소수민족이 즐기던 차다. 윈난성은 해발 2000m 고지로 연교차가 작고, 일교차가 커 차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이다. 보이차는 윈난성에서 자라는 대엽종 찻잎을 원료로 햇볕으로 수분을 제거하는 쇄청건조법 등 특별한 과정을 거쳐 만든 차를 일컫는다. 이 때문에 보이차는 모두 중국산이다.
세월을 두고 발효가 진행되는 후(後)발효차로, 제조기법에 따라 생차(生茶)와 숙차(熟茶)로 구분된다. 생차는 적절하게 건조된 찻잎을 증기에 쐬어 압력을 가해 말린 것으로, 오랜 기간 발효시켜야 마실 만한 보이차가 된다. 숙차는 습기를 공급하며 말리기를 반복해 발효과정을 인공적으로 촉진시킨 것이다. 우려냈을 때 생차는 진한 귤색을 띠며 씁쓸한 맛이 강하다. 숙차는 자줏빛에 가까운 진한 색을 띠며 구수한 맛을 낸다.
보이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는 차로 보통 10년 이상 지난 것부터 마시는 것이 좋다. 무조건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생차는 50~60년, 숙차는 30~40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보이차는 일반적으로 찻잎을 떡처럼 뭉쳐 편편하게 만든 뒤 한지 등으로 포장해 판매하는데, 마실 때는 조금씩 부숴서 마시고 한지로 다시 싸 보관하면 된다. 냄새를 잘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방이나 냉장고 등에 보관하면 맛과 향을 망치게 된다. 40~75%의 습도가 유지되는 항아리에 한 번 더 넣어 보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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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를 마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마실 때마다 작은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부어 우려내 마실 수 있고, 큰 주전자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차를 넣고 10분 정도 우려낸 뒤 나눠 마셔도 좋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